긴 한낮의 끝

 선혜는 그날도 동생들과 놀이터에 나가 대낮부터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2001년 여름할머니 집에서 살게 된 아이들이 가진 놀거리라고는 손잡이가 달린 통플라스틱 모양틀이 전부였다선혜의 동생들은 선혜보다 아홉 살다섯 살이 더 어렸다.

 그들은 고요한 아파트 숲 사이에서 뜨거운 태양 빛을 받으며 흙놀이를 했다흙을 퍼서 통 속에 옮겨 담고 그것을 엎었다 무너뜨리기를 반복했다세상의 어른들은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다른 아이들도 방학을 맞아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선혜는 그 틈을 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오른쪽 호주머니 속에서 100원짜리 동전 2개가 만져졌다엄마 목소리를 듣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동생 중 더 큰 애에게 막내를 맡기고 시야에 들어오는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엄마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선혜니?”

엄마!”

 틀림없는 엄마의 목소리였다그동안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엄마는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했다.

선혜야지금 동생들이랑 있지당장 만나자.”

어떻게그게 가능해?”

 

 그들은 한 달 전 강제로 떼어진 처지였다. 1년간의 이혼 소송 끝에 양육권이 선혜 아빠 쪽으로 넘어가 이제 막 아빠 쪽에 살게 된 참이다그런데도 엄마는 열세 살짜리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등포역에 있는 여관으로 와주소 불러줄 테니까 택시 아저씨에게 알려드리고돈은 도착해서 엄마가 낼게.”

 선혜는 가슴이 뛰었다이제 곧 엄마를 만날 수 있다할머니 집 작은 방에서 잠든 두 동생의 얼굴 위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드리워진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며 엄마와 며칠이나 떨어져 지냈는지 헤아렸던 지난밤이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선혜는 곧장 동생들에게 달려갔다동생들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옷의 구김을 펴주면서 영등포구 영등포동 223-1번지를 중얼거렸입안에 담고 있지 않으면 금세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택시 타는 곳으로 가는 동안 들고 있던 파란 통 안에서 달그락 소리가 크게 들렸다선혜는 언덕길을 내려가며 네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펴보았다등 뒤에서 아스팔트 위로 플라스틱 물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선혜는 들킬세라 마음을 졸였다뛰면서 힐끔 뒤를 돌아보니 모양틀이 색깔별로 떨어져 있었고 길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삽과 파란색 통도 보였다영화 속 한 장면 같다고선혜는 생각했다.

 큰 길가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잡았다동생들을 먼저 태운 선혜는 숨을 고르고 영등포동 223-1번지로 가달라고 다급히 말했다엄마에게 가는 내내 선혜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명절에 아빠 차를 타고 할머니 집에 갈 때 보았던 상가들로부터 자꾸만 멀어졌다이상하게 가슴이 쿵쾅거렸다곧이어 처음 보는 서울 풍경이 이어졌고점차 눈에 익어갈 때쯤 낡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선혜는 멀리서부터 엄마의 모습을 알아보았다간판이 겨우 매달려 있는 듯한 건물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람이 선혜의 엄마였다선혜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동생들이 엄마를 부르며 안기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엄마와 드디어 만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들은 1층 여관방으로 들어갔다가까이에서 본 여관 내부는 더욱 낡아 보였다누런 벽지에서는 케케묵은 냄새가 났고 침대 매트리스는 삐걱거렸지만선혜에겐 아무렴 상관없었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만화 캐릭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지금이 꿈만 같았다.

 선혜는 정체 모를 꽃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소파에 앉아 우둘투둘한 패턴을 만지작거렸다텔레비전 음량을 거의 들릴 듯 말 듯 하게 맞추어 놓은 탓인지 만화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선혜는 이불 하나를 나란히 뒤집어쓰고 있는 동생들과 엄마를 바라보았다.

 우리와 함께 있을 때면 엄마의 얼굴은 늘 환하게 빛이 났다우릴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을 볼 때마다 그 사랑이 도대체 어디서 퍼 올려지는 건지 선혜는 늘 궁금해했다그 모습을 다시 보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그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선혜는 입꼬리에 힘을 주어 살짝 올려보았다.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거기 양경희씨 계시죠경찰입니다문 열지 않으시면 강제로 열겠습니다.”

선혜의 엄마는 곧장 텔레비전 전원을 껐다네 사람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쾅쾅쾅 소리가 점점 커졌지만 그래도 반응이 없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문밖에 몇 명이 있는지 가늠되지 않았다선혜도 이불 속으로 들어가 엄마 옆에 달라붙었다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엄마는 세 아이의 눈을 보며 말했다.

별일 없을 거야조금만 기다려 금방 얘기하고 올게.”

엄마가 문을 엶과 동시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그들 뒤에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아빠도 있었다어떻게 우리가 있는 곳을 알았지아빠는 이 시간에 회사에 있지 않고 왜 여기에 있지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오후 5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경찰들은 엄마를 범죄자처럼 취급했다신발도 벗지 않은 채 방에 들어와서는 왜 아이들과 있었느냐고 추궁했고 우리와 더 있겠다고 사정하는 엄마를 강제로 끌어냈다어린 동생들이 엄마를 부르며 울어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선혜는 엄마와 자식들이 만나는 게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은 엄마를 경찰차에 태우자마자 출발해 버렸다선혜와 동생들도 별수 없이 아빠 차에 올라탔다선혜의 아빠가 말했다.

미친년.”

 익숙한 욕이었지만 돌아가는 내내 선혜는 아빠의 다른 말들이 잘 들리지 않았다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보아도 모든 풍경이 시시해 보였다건물 사이로 낮게 떠 있는 태양이 보였다건물 외벽에 햇빛이 반사되어 차 안으로 주황빛이 들어왔다선혜는 한쪽 눈을 찌푸렸다동생들은 지쳤는지 곤히 잠들어 있었다. 8월의 한낮이 길었다.

 할머니 집에 도착했을 땐 고모와 큰아버지그리고 할머니 집에 살며 노량진에서 공부하는 친척 오빠까지 와 있었다큰아버지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넓은 거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혼을 냈다늘 그랬듯 어린 동생들의 몫까지 대신해 선혜가 대표로 말했다.

 “죄송해요이제 이런 일 없게 할게요.”

 무얼 죄송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말했다죄송하다는 말이면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걸 선혜는 잘 알고 있었다고개를 들었을 때큰아버지의 뿔테 안경 너머 미간 주름이 더 깊게 패어 보였다아빠 옆에 있던 고모는 혀를 차며 말했다.

 “지 아빠가 얼마나 속상한지 애들은 알까 몰라.”

 고모의 형체가 시야 가장자리에 들어오지 않도록 최대한 애를 쓰며 친척 오빠 방으로 들어갔다그곳은 선혜가 할머니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경제 서적과 수험서 사이로 제 나이에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두꺼운 소설책이 꽂혀 있었다오빠가 공부하러 간 사이 몰래 오빠 책을 꺼내 읽으면 오빠처럼 스무 살이 된 기분이 들었다.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있을 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친척 오빠였다.

들어가도 될까?”

 까만 모니터 화면 위로 오빠의 모습이 비쳐 보였지만 선혜는 돌아볼 자신이 없었다여태 꾹

꾹 눌러 온 것들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누군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비웃을 거야세상엔 슬퍼할 일이 더 많다고 혼이 날 거야선혜의 마음이 제일 앞장서 선혜를 탓했다.

선혜는 오른쪽 어깨 위로 따뜻한 손의 감촉을 느꼈다오빠가 실컷 울어도 된다고 얘기해 주는 것 같았다일 년 전 엄마를 따라 살고 있던 집을 나갔을 때도아빠의 욕지거리를 견디던 순간에도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던 설명을 오빠가 대신 해주는 것 같았다.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멎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지만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선혜의 어깨 위에는 여전히 오빠의 손이 올려져 있었다

작품 등록일 : 2024-09-29
최종 수정일 : 2024-09-30
첫문단에 이소설이 어떤 느낌인지 알려줄 수있는 문장을 자연물 설명처럼 넣으면 좋을것 같아
뜨거운 고요한 이런 단어는 좀 중립적이야 감정 묘사가 없다면 단어라도 감정이 느껴졌으면
원서펀어타임   
ㅠㅠ
산들바람녀   
재밌음
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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