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펼친 페이지부터 무턱대고 읽어내려간다.
작가와 인사도 없이
그의 아주 내밀한 곳을 파고드는 느낌
이제 막 용솟음치기 시작한 뜨거운 피를 쥐고
넘쳐 흐르는 것을 바라보는 느낌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손에 든 네 모습은
아름다웠다.
내가 좋아하는 편집자가 좋아하는 작가 배수아가 번역한 그 책을
넌 차분히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오후의 햇볕이
너의 왼쪽 실루엣을 비춘다.
사랑하지 않지만 나는
너를 아름다워하고
웃을 때 입술 사이로 가지런히 빛나는 너의 하얀 이를
넋놓고 바라본다.
너와 나 사이의 공기에는
어떤 언어도 놓여있지 않고
너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사진 같아서
난 셔터 누르는 것을 잊는다.
내 눈이 널 이미 기억해버려서
네 덕분에 나의 연분홍 시집을 찾아들고는
이미 죽은 작가를 만나 그의 얘기를 엿듣는다.
내가 할일은 오직 시인의 일대기를 읽고
그의 이야기에서 나의 죽음과 너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
나는 세상을 바라보며
사라지고 폐허가 된 건물들 사이에서
홀로 피어난 너를 담아냈다.
그리고 너는 나를
죽은 나를 웃으며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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