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헬창을 하나 알게 되었다. 주변에 운동 좋아하는 사람 많았고, 헬스 열심히 해서 몸도 좋은 친구들도 있고, 또 파워 리프터도 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인터넷에서 말하는 ‘헬창’과는 거리가 좀 멀다.
인터넷에서 떠오르는 헬창들은 이상한 컨셉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몇 년 전부터 세간을 휩쓰는 헬창이라는 컨셉은 유난한 호들갑을 떠는 것이 특징이다. 근손실이라 하는 그들의 유머스러운 두려움 호소부터 어디 여행을 가서도 반드시 헬스장을 찾는다거나 식단관리와 프로틴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 친구도 그런 부류다. 내 주변에 헬스 열심히 하는 친구들, 파워 리프터, 인자강들은 그런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래서 헬창은 처음 만나 봤다. 결론은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극성 헬창들은 특정 인간 부류에 혐오감을 표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혐오를 품은 헬창과 오픈마인드 헬창이다. 전자는 극성 헬창, 후자는 유튜브 피지컬갤러리 채널의 김계란 같은 사람이다.
후자는 즐거움을 준다.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보이고,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도 별 말을 하지 않는다. 전자는 반대의 부류다.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감정을 가지고 있다.
유튜버 힙으뜸이 있다. 침착맨이 그와 함께 방송을 촬영한 적이 있는데 기관이었다. 왜 한 번 사는데 열심히 살지 않느냐부터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무례한 태도까지, 침착맨의 팬으로서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런 태도가 최근 만난 헬창 친구가 떠올리게 했다.
이 친구는 잘 이야기를 하다가도 갑작스러운 맥락으로 ‘멸치새끼’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몸이 좋기는 좋다. 하지만 그의 몸이 좋은 것과 별로 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이 ‘멸치새끼’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건 아무 상관이 없는 일 아닌가.
무엇보다 나는 몸 키우는 운동은 잘 하지 않다 보니 대놓고 날 디스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돈이 없는 사람 앞에서 ‘돈 없으면 거지새끼지 뭐’ 하는 꼴로 느꼈다. 기분이 나빠질 뻔 했지만 나처럼 수행이 잘 된 사람은 탁 알아채고, 그 이야기는 받지 않겠습니다 하고 흘려보낸다.
그런데 이 경우를 하나의 예시로 하면 유사한 수많은 경향성을 찾을 수 있다. 극성 헬창들은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한심한 사람, 인생 막 사는 놈, 자기관리라고는 쥐뿔 못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한다. 실제 이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다. 자기 관리도 하고 살아야죠 하며 운동도 안 하면 사람이… 한다.
아주 기괴한 사고방식이다. 물론 운동을 하면 좋기야 좋다. 건강도 챙기고, 식단 관리도 하고, 몸이 보기에도 예쁘다. 하지만 안 한다고 나쁜 건 아니다. 헬스를 하지 않더라도 건강할 수 있고, 살면서 딱히 아프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나. 그럼에도 그는 헬스를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판단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덮어 씌운다. 정말 희한한 방식이다.
이런 유사한 현상은 몇몇 취미생활에 유별나게 빠진 사람들에게도 찾을 수 있다. 독서를 광적으로 한다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기치료와 단전체조를 한다거나, 종교에 극심하게 빠져있다거나 하는 식이다.
공통점은 그것을 하지 않으면 인생 살 자격이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자기 인생을 그렇게 여기며 매달릴 수는 있다. 그거야 사람 자유다. 그걸 남에게도 적용시키니 이야기가 불쾌해진다.
그런데 같은 취미가 있더라도 남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즐겁게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언급한 두 헬창 중 김계란과 같은 부류다. 그러면 왜 누구는 즐겁게 즐기면서 다른 사람을 즐겁게 초대하는 반면 누구는 남을 멸시하며 한심하게 여기는 것일까.
책, 좀 안 읽더라도 뭐 문제가 없다. 영화 좀 안 봐도, 운동 좀 안 해도, 그러니까 운동을 하면 좋지만 미친놈처럼 단백질에 환장하고, 근손실을 입에 달고 살며, 몸집을 불리지 않는다고 사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는 것이다.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누구든 그 시간에 자기에게 최선인 선택을 하며 열심히 살아간다. 그 최선이 이 친구들의 선택지에서 최우선순위가 아니었을 뿐이다.
이 극성 헬창 친구, 자기 취미에 빠져 같은 취미를 갖지 않는 다른 사람을 깔보는 친구들의 공통점이 있다. 과거 큰 결핍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헬창 친구의 경우, 과거 뚱뚱한 돼지였다. 몸무게가 세 자리수를 넘었다고 하니, 씨름선수가 아니고서야 건강이 위험한 지경까지 살을 찌운 것이다.
그의 과거 삶에 대해 듣고 싶지 않았고, 관심을 가진 적도 없지만 얼핏 새어 나오는 그의 과거에서 꽤나 잔인한 상처를 발견했다. 우리 사회에서 돼지들이 받는 눈초리는 안 받아 본 사람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사회는 잔인하고, 상처 받는 사람들에게 무심하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상처를 피해의식과 열등감으로 덮어 버린다.
그랬던 그가 운동을 열심히 해서 바디프로필을 찍을 정도로 몸을 키웠으니, 가히 그 극복과정은 우리네 휴먼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받은 모멸감만큼 그도 남을 깔보고 싶었으리라.
치욕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하나의 독특한 세계관이 세웠을 것이다. 사람은 줄 세울 수 있고, 앞에 선 사람은 뒤에 선 사람을 욕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그 줄의 기준은 헬스와 근육량, 체지방률, 바디프로필 사진의 유무가 될 것이다.
찐따가 권력을 쥐면 일진만큼 잔혹하다. 서열의 우위에 선 사람의 우월감과 후미에 선 사람의 치욕은 동일한 감정이다. 극성 헬창 친구의 운동은 서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우위에 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의 세계관은 밑바닥부터 위로 올라가는 시간 내내 공고해졌다. 그러다 때를 잘 만나 헬창이 유행하기 시작하며 아, 세상이 인정해 주는구나 하고 물 만난 고기가 된 것이다.
아래가 있어야 위가 있고, 세상이 공인해주기 시작한다. 너는 위에 있어도 된다고. 그러려면 끊임없이 아래를 만들어야 한다. 오만 사람을 만나며 밑으로 집어 넣고 싶어한다. 좋은 명분도 있다. 안 한다고 나쁠 게 없다는 것이다. 하면 좋다는 명분이다. 하면 좋은데 왜 하지 않느냐.
자기 존재를 끝없이 남으로 채우고 싶어하는 꼴이다. 스스로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차이가 생겨나는 부분이다. 극복을 이룬 사람들은 이렇게 다른 테크를 타고 살아간다. 나의 극복을 두고 남을 끌어와 확인 받고 싶어하는 방식이다. 남이 없으면 자기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가 행복함에 다행이라 생각한다. 쉽사리 자기파괴로 빨려들어가 파멸에 달할 수 있음에도 그는 행복하다고 한다. 행복한 사람에게 굳이 왈가왈부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그가 계속해서 나를 자기 세계관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은 정중히 거부한다. 적당히 칭찬해주고 맞춰줄 순 있어도, 굳이 내가 낮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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