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나는 1년동안 대안학교라는 곳에 갔다.
그 학교는 양아치들만 가는 곳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난 그저 안경 쓴 찐따였다.
그냥 일반학교에 적응 못하는 사회부적응자라서 간 거였다.
애송이였던 나는 애송이다운 생각으로 머리에 똥만 차 있었다.
찐따로 보이기가 싫어서 화장을 시작하고 머리는 가발을 썼다. 렌즈도 처음 꼈는데 싸구려 써클이라 금방 다시 새로 사야했다.
머리는 몇달 전에 엄마랑 싸우고 홧김에 가위로 잘라버려서 찐따로 안 보이려면 가발이 필수였다.
왜 잘라도 남자만큼 짧게 잘랐는지. 그래도 난 머리가 빈 깡통이었기에 후회도 안 했다.
학교는 우리집과 왕복 3시간 거리였다.
학교엔 양아치와 찐따들이 골고루 섞여있었는데 난 찐따과거가 밝혀지는 게 싫어서 양아치처럼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거기서 전혀 예상치 못하게 내 인생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만났다.
딱 봐도 쎈척 허세 쩌는 양아치 여자 두명이 교실에 앉아 있었다. 둘다 17살인데 1년을 꿇어서 중학교 3학년이랜다.
한명은 그냥 평범했는데 옆에 있는 다른 여자는 눈에 확 띄게 예뻤다.
키는 나랑 비슷하게 작았는데 얼굴도 엄청 작았고 마른 몸매에 머리는 긴 파마머리였다. 그 언니가 오드아이 언니다.
(언니는 진짜 오드아이는 아니고 그냥 컬러렌즈를 양쪽이 다른 색깔 짝짝이로 껴서 오드아이다.)
학기초에 애들한테 인사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양아치 여자 두명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오드아이 언니가 날 보고 옆에 있는 친구한테 "예쁘지 않냐?"라고 했다.
와 방금 나보고 그런거 맞지?
저렇게 놀아보이고 예쁜 여자가 나보고 예쁘다고 하다니.
나 더이상 찐따처럼 안 보이나봐. 난 가슴이 쿵쾅거렸다. 완전 들떴다.
.
인사하는 시간이 끝나고 오드아이 언니랑 언니 옆에 있던 양아치 여자가 다가왔다. 양아치 여자가 말했다.
"너도 이 근처 살아?"
"아니요. 저는 멀어요."
근데 내 말투가 너무 단호했나보다. 찐따답게 사회성이 부족해서 당황해서 대답한건데. 양아치의 표정이 별로 안 좋아져서 나의 불행이 예상되었다.
"야, 근데 너 시계 예쁘다. 나한테 팔면 안돼?"
그 자리에서 양아치한테 지마켓에서 5900원 주고 산 시계를 2만원에 팔았다.
개이득이었지만 그래도 찐따처럼 보이고 만 거 같아서 자극 받았다.
나는 학교 근처 동네에 남자친구가 있고 한강에서 오토바이도 타본 것처럼 구라를 술술 쳤다.
"노원구면 네 남자친구 우리랑 아는 애일 수도 있겠네."
오드아이 언니가 그렇게 말하면서 날 쳐다봤다.
목소리도 완전 귀여웠다. 순간 아차했지만 구라를 멈출 수 없어서 "그럼 그럴 수도 있겠네요."하고 넘겼다.
.
언니랑 붙어다니는 양아치는 쎈척을 하느라 매일 엄청 시끄럽게 떠들어댔는데 걔 때문에 언니 목소리가 안 그래도 작은데 더 안 들렸다.
난 다른 애들이랑 노는 척 하면서 계속 그 언니를 쳐다보고 맨날 둘이서 떠드는 걸 엿들었다.
아침에 된장찌개 먹은 얘기, 전라도 방언 따라하고 놀기, 편의점에서 오드아이 언니가 번호 따인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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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는 평범한 학교랑 달라서 기본과목 제외하고도 수업이 여러가지가 있었다.
어떤 날은 땡볕에 텃밭을 가꾸러 갔는데 너무 짜증이 났다.
잘 피지도 못하는 담배를 애들이랑 같이 다니려고 억지로 피는 것도 점점 조마조마해졌다.
아무 말도 안 하고 혼자 교실에 일찍 들어갔는데 안에 오드아이 언니 혼자 있었다.
언니는 <화장의 기술>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몇년 후 도서관에 처음 공부라는 걸 하러 갔을 때 나는 그 책을 제일 먼저 찾았다.
왜 너도 일찍 들어왔냐고 하길래 생리통 때문에 그렇다고 대충 둘러댔다.
그리고 너무 조용하길래 뻘쭘해서 엎드려서 자는 척 했다.
언니를 계속 훔쳐봤는데 아무리 봐도 너무 예뻤다.
큰 눈에 속눈썹도 완전 길고 피부도 좋았다.
난 그냥 내가 얼빠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좋아했던 게 맞는 거 같다.
.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양아치가 나보고 갑자기 "너 남자친구 이름이 뭐라고 했지?"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상균이라는 이름을 댔다.
왜 뜬금없이 상균이냐면 내가 최근에 봤던 뉴스의 기자 이름이 상균이라서 상균이라고 했다.
"노원구에 우리가 아는 상균이는 한명도 없는데?"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내가 한참동안 말을 안 하고 멍때리니까 다들 "쟤 뭐지?"하는 표정이 되었다.
비상사태였다. 내가 지금까지 한 수고가 모두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었다.
난 찐따로 밝혀지는 건 물론이고 구라쟁이로 낙인 찍힐 것이다.
다행히 며칠 동안 애들이 남자친구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요즘 연락도 잘 안 하고 깨질 거 같다고 하면서 밑밥을 깔아놨었다.
그래서 난 그날 하루종일 우울한 척 연기를 했다.
내 연기의 정점은 눈물연기였는데 화장실에서 필사적으로 비눗물을 눈가에 묻혀서 억지로 눈물이 나게 했다.
서럽게 우는 척을 했더니 양아치언니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뭐야, 너 왜 울어?"
"전 아직도 좋아하는데 벌써 3일 째 연락 안돼요. 그 오빠랑 깨진 게 맞는 거 같아요."
양아치는 아무 말도 안 하더니 나가서 오드아이 언니를 불렀다. 숨죽이고 있는데 화장실 밖에서 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어떡해. 우리가 오해했나봐. 쟤 진짜 울어~"
"뻥 아니었어?"
"남자친구 있는 거 진짜였나보지."
적당히 시간이 지난 거 같아서 나는 교실로 돌아왔다. 다행히 눈에선 아직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렌즈 낀 상태로 비눗물이 들어가니까 눈이 엄청 따가워서 눈물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다들 날 쳐다만 보고 웅성웅성거리는가 싶더니 얼마 안 가서 한두명씩 하교를 했다.
교실엔 나랑 오드아이 언니, 양아치 세명이 남았다.
양아치도 오드아이 언니한테 이제 집에 가자고 했다. 그리고 먼저 나갔는데 언니가 뒤따라가지 않고 갑자기 나한테 다가왔다.
어쩔 줄 모르고 쫄아있는데 언니가 손을 뻗어서 내 눈물을 손으로 직접 닦아줬다.
"00아, 남자한테 차였다고 울지마. 남자는 또 만나면 되는거야."
그리고 한참동안 날 위로하다가 양아치가 안에서 뭐하냐고 왜 안나오냐고 소리지르니까 언니도 나갔다.
언니의 손은 따뜻했었다.
난 혼자 멍하니 서있다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갔다.
그후로는 언니를 못봤다.
언니가 그 양아치 친구랑 같이 학교에서 잘렸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흐린대나 뭐래나.
선생님들이 원망스러웠다. 양아치언니가 잘린 건 솔직히 기뻤는데 그 언니까지 같이 쫓겨나니까 속상했다.
그 후론 학교생활 진짜 재미 없었다. 말도 별로 못 섞어봤던 그 언니가 그리웠다.
예쁘고 착했던 오드아이 언니. 좋은 향기도 나던.
왜 계속 생각날까. 언니는 떠난지 오랜데.
친하지도 않았는데.
위로해준 게 그렇게 고마웠나?
고마웠던거야, 설렜던 거야?
어쨌든 난 그 학교를 무사히 졸업했고 우리 동네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다. 1년 밖에 안 다니고 자퇴했지만.
그후로 남자친구를 여럿 사귀게 됐는데도 가끔 뜬금없이 언니가 생각나고는 했다.
난 분명 이성애자가 맞을 텐데.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잊혀지기는커녕 더 애틋하게 기억이 보정되고 있었다. 언니의 미모도 기억 속에서 더욱 빛났고.
저물어가는 해가 보이는 교실 안.
언니의 향기나는 손.
걱정스러운 눈빛.
좀 오글거리지만 이런 식으로 별거 아니었던 일이 평생 남는 기억이 되어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우웩)
세월이 흘렀고 싸이월드가 유행에서 밀리고 페이스북이 대세 sns가 되었길래 어느날 언니 이름을 검색했다.
금방 찾았다.
역시 세월이 흘렀는데도 언니의 미모는 변함이 없어. 나도 여전히 얼빠고.
근데 아직도 언니보다 예쁜 여자는 본 적이 없다.
친구추가를 걸었는데 다행히 받아줬다. 그래도 언니가 날 기억할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으니까.
그런데 친구추가한지 얼마 안돼서 언니한테 메세지가 왔다.
"누구세요?"
"언니,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요. 중학교 때 학교 잠깐 같이 다녔었어요."
"사진보고 혹시나 했는데~ 너구나. 여전히 예쁘다."
반가웠다. 너무 기뻤고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난 확신했다. 그녀가 나의 첫사랑이라고. 아무한테나 말하고 다닐 순 없겠지만.
그후로도 가끔 연락은 하고 지냈지만 언니를 만나진 않았다. 이상하게 직접 대면하는 건 두려웠다.
또 몇년이 지나갔다. 난 20대 후반이 다 되어간다. 이제는 예전처럼 머리에 똥만 들어있진않고 다행히 다른 것들도 좀 채워졌다. 나이만 먹은건데 기분 탓이려나.
그래서 그런지 놀랍게도 내년에 결혼할 예정인 남자친구도 생겼다. 내겐 과분할 정도로 착하고 성실한.
어느새 또 시간이 흘러 페이스북이 대세였던 시대도 지나갔고 요즘은 다들 인스타그램을 많이 한다.
오드아이 언니는 고맙게도 계속 근황을 올려준다.
주로 오래 사귄 남자친구랑 같이 찍은 사진이나 셀카가 올라오는데 날이 갈수록 더 예뻐진다.
언니는 직접 만든 요리를 예쁘게 플레이팅한 것도 자주 올리는데 내가 너무 맛있어보인다고 댓글을 달았더니 나보고 자기 집에 놀러오면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또 말 한마디에 설레고 기뻤다.
다시 만날 날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sns계정을 아직도 살려둔 이유는 첫사랑 때문이다.
(에필로그)
최근엔 언니도 남자친구한테 프러포즈를 받은 거 같다.
하긴. 동거한지 오래 된 거 같던데.
언니는 두부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키운다.
여전히 요리를 잘 한다.
그리고 지금도 렌즈는 꼈지만 더이상 오드아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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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
아련한 향수 느끼게 해주어서 고마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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