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범선을 타고서

 

새롭게 이사한 집은

혼자 살기에 딱 좋다

작단 얘기지

 

그래도 방이 세 개나 있어서

내가 자는 방

옷이 자는 방

책이 자는 방 골고루 사이좋게 나누어 쓰고 있다

 

거실이 방만큼 작아져서

고마 나는 답답함에 자주 종종 베란다에 나와 앉아있다

 

나 사는 곳 어디서든 바다가 보였다

이제는 바다 대신 하늘이 보인다

층 수는 전보다 딱 10층이 낮아졌지만

대신 이제는 달 동네 산 꼭대기라,

그중에서도 제일 꼭대기 층이라,

그래서 거슬릴 것 없이 하늘이 아주 잘 보인다

 

이사 온 후로 내내 비가 오다 가다 해는 비춰도 하늘은 흐린 그런 날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 날에도 저런 날에도 나는 베란다에 나와 앉아 있다

베란다 만큼은 전보다도 널찍하다

 

그래서 베란다에 나와 앉아 정면을 응시하면

나는 늘 이 장면을 본다

 

커다란 범선을 바라보는 기분

내가 탄 이 범선의 꼭대기도 저렇게 생겼겠지

 

실제로 나는 배를 자주 보았다

작은 낚싯배부터 오징어배 해경의 배  해양고등학교의 배  요트 크루즈 등등

 

허나 실제로 나는 배를 타본적은 없다

그저 정박한 배들이 미묘하게 울렁이는 모습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다

뿌뿌-하는 뱃고동에 화들짝 놀라거나

아니면 바라만보다 뱃멀미가나서 몸을 일으키거나

 

나는 이 범선을 타고 밤새 잠을 자며 항해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배에서 내려 낮 동안 돈을 번다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 배로 돌아오면

다시 누워 밤새 항해를 한다

일렁이는 파도 탓에 나는 주로 밤마다 뱃멀미를 앓는다

이리저리 고쳐눕고 모로누워도 불편하다

 

배에는 원래 쥐가 많다

잠시 정박한 사이에 밧줄을 타고 기가막히게 숨어든다

그런 쥐를 잡으려 고양이도 탄다

 

나는 밧줄이 되어 부지런히 머릿속에 쥐새끼들을 가득 싣고 배로 돌아온다

그런 쥐를 잡으려는 심산은 아니지만 산호도 누운 나를 타고 오른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내 배를 탄다

 

배에 탄 쥐새끼들은 곡식을 탐하고 병을 옮긴다

내 머리에 탄 쥐새끼들도 내 정신을 갉아 먹고 우울을 옮긴다

산호가 밤새 쥐새끼들을 소탕하지만

다음 날이면 또 잔뜩 쥐를 달고 나타난다

산호는 그런 나를 탓하지 않는다

밤새 쥐를 잡느라 선잠을 잔 산호는 내가 돈을 벌러 간 낮 동안의 고요를 즐긴다

 

우리는 커다란 범선을 타고서

밤이면 항해를 하고, 낮이면 돈을 벌고, 달이 뜨면 쥐를 실어 나르면서 그렇게 살고 있다

작품 등록일 : 2024-04-09
최종 수정일 : 2024-04-09
왜 눈물이 나노 ㅠ
팡안리   
ㅠㅠ 흐흐흑 ㅠㅠ
아침 잠이...   
그렇게 살고 있다
산토리니   
아름답다 정말
Jay   
좋다
  
오 자가도 있고 멈머도 있고 부러워
벽지는 나중에 날 잡아서 다 뜯고 못자국 싹 메꾸고 아예 서양집처럼 페인팅하면 안 되나?? 부분이 더러워지면 걍 그 페인트 쓱 바르면 새것같더라고
꺌꺌   
너무 좋다
꿀주먹   
와...
Asher...   
역쉬 언니 글 참 좋다
nu*****   
ㅠㅠㅠ
warm   
ㅠㅠ아련하고 아름답다
진미오징어   
와 .. ㅜㅜ 뭔가 먹먹하고 슬픈데 아름다운글이다.. 헹텐언니가 산호엄마였구나…맞지? 나두 강아지랑 둘이 산다 ㅎㅎ 헹텐언니 산호랑 오래오래 행복하길..♡
joo   
역시 행텐 언니
Cisse   
아름다운 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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