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처음 사람을 때린 날
네가 처음 사람을 때린 날, 너는 파들파들 떨었다. 너는 걷어채여 놀란 개새끼 같은 얼굴을 하고 새벽에 몰래 들어왔다. 거실의 가족 사진을 등지고, 티비도 꺼놓은 채 소파에 앉아있던 내 앞에 너는 풀썩 무너졌다. 너의 커다란 몸이 순식간에 작아졌다. 응축된 술냄새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너는 말했다. 사람을 때렸어. 그러느라 늦었어. 너는 엉망이 된 주먹을 보여주었다. 머리가 아팠다. 무슨 말이야, 그게. 팀장을 때렸어. 주여, 라는 말이 머리를 울려댔다. 교회엔 나가본 적도 없는데. 정신 차려보니까 좁은 골목길이었어. 코뼈가 완전히 부스러진 것 같았어, 그 인간. 정신없이 때렸어. 그 새끼가, 그 새끼가 먼저 내 뺨을 쳤어. 나 병신같지? 나는 화를 먼저 내야 할지, 화를 낸다면 새벽 2시까지 연락도 없이 늦은 것부터 따져야 하는지, 그의 폭력성을 혼내야 하는지,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게 술주정인지 몰라 잠자코 그 주먹만 바라봤다. 결혼 반지에 얼룩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저게 팀장의 피일까.

대답해봐, 나 병신같냐고. 아무 말도 못 하는 거 병신같지, 응? 욕도 못하고 그저 순하기만 한거 병신 같잖아, 남자 새끼가, 시발. 팀장이고 선배고 눈치껏 못 빨아주는 거, 사회 생활 좆도 못하는 거 병신 같잖아. 거래처 직원 다 불러놨는데 멀뚱히 앉아만 있는거, 그거 병신이잖아, 응. 남들 2차 갈 시간에 집에 빨리 가서 분위기 깨는 거 병신이잖아, 응. 여자를 불러놓고 만지지를 않으면 사장님 기분 다 잡치는데 그게 병신이 아니면 뭐냐고 시발. 그래서 병신을 하겠다는데 왜, 왜, 왜 건드려, 왜 건드리냔 말이야 왜. 너는 엉엉 울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다음날 아침 팀장의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몇시간 자지 못해, 퉁퉁 부은 눈두덩을 하고 너는 웅얼웅얼 전화를 받았다. 죄송합니다. 병원비는... 네, 죄송합니다.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전화기 밖으로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데 너의 대답은 네 입을 맴돌뿐이었다. 팀장은 그대로 쓰러져 119에 실려갔다고 했다. 앞으로 3개월은 입원해야 하는 그의 생활비와 병원비 일체를 너는 물어주기로 했다. 너는 회사를 그만뒀다.

내가 그날 퇴근을 하고 돌아왔을 때, 너는 냉장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시간이 나네. 저녁은 수육이야. 이것만 마무리하고 밥 차려줄게. 화장실도, 베란다도 온 집안이 번쩍번쩍했다. 네 손에 반지도 다시 반짝거렸다. 우리는 거실에 상을 차려놓고 영화를 봤다. 에드워드 노튼이 인종주의자로 나오는 영화였다.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혐오스런 유색인종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것'으로 대신하던 그는 아버지의 낡은 자동차를 훔치려는 흑인들을 총으로 쏴죽이고 감옥에 간다. 감옥에서 에드워드 노튼은 온갖일을 다 당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파멸시킬 뿐인 자신의 분노가, 부질없다고 느낀다. 출소해서 보니 그를 따르던 동생은 더 엄청난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어 온갖 흑인패거리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에드워드 노튼은 동생을 설득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동생이 누굴 잡아패든, 어떤 분노의 미친 짓을 하든. 마침내 형제가 아버지 사망 후 처음으로 마음 속에서 어떤 평화와 희망 같은 것을 발견한 순간, 동생이 흑인의 총에 맞아 숨진다. 에드워드 노튼은 뒤늦게 동생을 안아들고 오열한다. 그때, 기리에 엘레이손하고 성가가 울려퍼졌다.

영화가 끝나기 전부터 나는 너무 울어서 너와는 한 마디도 나눌 수가 없었다. 쭈그리고 누워 이불을 뒤집어 쓰고 나는 내내 그 말만을 중얼거렸다. 기리에 엘레이손.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이 삶을 가엾이 여기소서. 우리들은 사랑과 분노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지키고 싶은 마음과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공격하는 마음을 우리는 구별해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때리고 뜯고 할퀴는 것은 우리가 사실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 우리는 분노합니다. 우리는 잔인해집니다. 주여, 우리는 그렇게 불쌍한 짐승들입니다. 부디 불쌍히 여기소서. 이 한푼의 증오와 이 한푼의 분노를 부디 가엾이 여기소서. 차라리 거두어 가소서. 그 발 아래 엎드려 이 삶의 잘못을, 이 벗어날 수 없는 때를 모두 씻어내고 싶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무신론자인 나는 그날 하염없이 주를 찾았다. 우리를 초월한 누군가가 있어, 우리의 잘못을 심판하지 않는 누가 있어, 우리의 어리숙함을 용서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내가 알지도 못한 채 저지르는 죄들도 모르고, 잘 살아내려고 하는 어설픈 도덕도 모르고, 가능한, 태어났을 때의 순결함을 그대로 가진 채로, 부디 그런 채로 그 거대한 존재의 발 아래 다가갈 수 있기를, 마리아에 들린 죽은 예수처럼 안길 수 있는 그 때만을, 나는 하염없이 생각했다
작품 등록일 : 2024-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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