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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는 기차를 타고 아버지의 고향집에 갔다.
아버지가 회사를 다니던 시절에는 회사에서 명절마다 기차표를 줬고 우리는 차가 없었다.
추석에 기차를 타는 것이 좋았다.
늦 여름에서 가을의 시작이 걸쳐있는 때라 드높은 하늘과 포근한 기온도 좋았지만 늘 똑같은 창밖의 풍경이라도 이왕이면 짙은 녹음과 간간이 드러내는 단풍의 빛깔이 좋지 않은가. 기차 안에서 유치원에 막 들어간 아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여정이 끝날 때까지 풍경을 보고 또 보고 창밖에 입김을 불어 글씨를 쓰거나 간식 카트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밖엔. 몇 년을 기차를 타다 보면 어디만큼 왔는지를 풍경을 보고 알아맞히기도 하고 했다.
내 경우에는 검은 물결이 펼쳐지는 인삼밭이 보이면 알아챘다.
적어도 일 년에 2번은 와야 하는 그 옛날의 서울역은 내게 오페라 하우스같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갖고 있는 비디오테이프 중에 유럽의 어딘가를 촬영한 외국 영상들이 있었다. 서울역은 꼭 그런 이국적인 세계에서 볼 법한 도시 건축물과 비슷했다. 나는 그런 건물을 보면 오페라 하우스라고 했다. 특히 서울역의 입구로 들어가면 수 백 명이 오르내릴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계단이 있다. 엄마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다 보면 저 건너편에 누군가가 나를 잡으려고 기다리지 않을까, 나를 잡으면 안 되는데, 하지만 나를 잡아줬으면 좋겠고, 그런 상상으로 긴장감과 설렘이 있었다.
아버지는 서울역 근처에 있는 가장 큰 빌딩에서 일을 했다.
엄마와 함께 역 앞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건물을 찾았다. 17층이라고 했었나? 나는 눈을 찡그리며 저 멀리 있는 건물의 층수를 세어보겠다고 용을 썼다. 그러다 아버지가 오면 거의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대합실은 제대로 구경해볼 틈도 없이 엄마의 손에 이끌려 헐레벌떡 기차에 올랐다. 엄마는 나도 챙기고 짐도 한가득 챙겨야 해서 양손이 쉬질 못했지만, 아버지는 늘 혼자서 가벼운 서류 가방을 하나만 들 뿐이다.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이해가 안 되는데, 엄마도 짐을 들어달라는 부탁을 일절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아쉬운 건 개찰구를 너무 빨리 통과 해야 하는 것.
아버지의 회사에서는 어른 2장의 기차표만 줬기에 나는 자리가 날 때까지는 엄마의 무릎 위에 앉아서 갔다. 아버지는 자리에 앉기 전에 정갈하게 양복을 창가 근처에 있는 고리에 걸어두고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내 귀 양쪽에 꽂았다. 이내 눈을 감고 잠들면,
엄마는 아버지가 너무 피곤해서 주무시니까 조용히 해야 한다고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그렇게 얌전한 편은 아니라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어딘가 뛰어다니고 싶어도 기차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차서 옴짝달싹 못하자 애꿎은 두 발반 동동 거리며 엄마를 더욱 힘들게 했다.
우리처럼 앉아서 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로까지 빼곡히 서 있었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앉을 수 있으면 양해를 구하고 앉기도 했는데, 조용히 지나가는 법이 없이 누군가는 꼭 시끄럽게 다퉜다.
어른들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나는 울면 안 되고 떠들면 안 되고 소리 지르면 안 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고 싶으면 어떻게요?
그러면 엄마는 나를 꼭 끌어안아주면서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조금만 조금만 언제까지 참아요?
내 물음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자 엄마는 자고 있는 아버지 귀에서 이어폰을 하나 빼서 내게 들려줬다.
너무나도 익숙한 노래들.
엄마 뱃속에서부터 들었던 아버지 취향인 팝송들이다.
엄마는 아무리 말해도 진심으로 믿어주지 않았지만 나는 기억력이 꽤 좋아서 그때보다 더 어린 시절, 2살 때라던가 혹은 엄마 뱃속에 있었던 때도 기억했었다.
이어폰에서는 all4one의 so in love가 흘러나왔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후렴구를 그럴듯하게 따라 부르며
왠지 엄마에게 불러주고 싶은 느낌이라, 괜히 엄마를 마주 보며 흥얼거렸다.
엄마는 그저 딸의 흥얼거림이 귀엽다는 표정일 뿐.
as we stroll along together...
we don't know what to do...
so in love.. so in love..
하지만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음악 감상을 즐겼다.
전축으로, 시디플레이어로, 좋아하는 노래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던 모습이 선하다.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어느새 이리역에 도착했다.
내가 기대하는 건 따로 있었다.
이미 그 전역부터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가고 이리쯤 되면 간식 카트도 수월하게 들어온다.
엄마는 이리에 도착하면 다 온 것이라며 달래면서 아무것도 사주지 않았다.
정말 한번 사줄까 말까 할 때 그마저도 두유 하나 정도.
왜 과자를 먹으면 안 돼요?
엄마는 과자나 소시지를 많이 먹으면 몸이 빨리 아프다고 했다.
아버지 친구들이 종종 과자 박스를 사주면 엄마는 즉시 장롱 안에 숨겨뒀다.
매번 박스 겉모양만 보고 도대체 속에 뭐가 들었는지 제대로 보지 못해서 호시탐탐 장롱을 열 기회만 엿보기도 했지만 감히 혼자서는 열어볼 수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과자나 빵 같은 군것질거리를 참 좋아했기에 엄마 몰래 아버지를 졸라서 과자를 먹을 수 있었다. 엄마는 모르는 척해줬던 건지, 내 생각에는 엄마는 참 무던한 사람이라 박스에서 과자가 몇 개 사라져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거 같다.
엄마, 어른이 되면 맘대로 다 먹을 수 있잖아요.
엄마는 다 먹을 수 있게 되는 게 문제라고 했다. 그래선 안된다고.
신기하게도 엄마 말대로 안 먹어 버릇하면 생각나지 않는다.
내 돈 주고 사 먹을 나이가 돼서도 잘 손이 안 가게 되더라,
하지만 그건 사람마다 다르더라, 이제 와서 엄마에게 따져 물을 생각은 없다.
우리 세 식구는 전주역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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