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세계관의 백합꽃 1

우리 집안사람들은 다 죽었다. 아주 잔혹하게 말이다. 

살해당하거나 누명을 쓰거나 처형 당했다. 아무도 우리 가문이 그런 꼴을 당해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아직 생리도 하지 않은 어린 여자애에 불구한 내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 매우 행운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나를 어떻게든 죽여버리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불행스러운 일이다. 

 

 

이런 와중에도 다행스럽게 난 완전히 혼자가 되진 않았다. 우리 집안사람들을 오랜시간 동안 지켜봐왔던 화가가 계속 나한테 편지를 보냈다. 

내가 안전한 곳에 있는지, 어떤 행색으로 살아있는지 그는 궁금해했다. 

그리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 법한 방법을 연구해서 나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나는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지만 그는 항상 안전한 오지에 은둔해서 살기 때문에 나는 발신자 불명의 편지를 어떻게든 그에게 보내기만 하면 되었다. 

 

 

 

난 14살이다. 가슴이 나오기 시작하다가 요즘 너무 못 먹어서 그런지 다시 납작해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우리 집안사람들은 원래 흑발에 피부가 다들 하얀데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하얘서 지금보다 더 어릴 땐 백설 공주라고 불리기도 했다. 

옛날엔 집안 어른들에게 자랑이었을지 모르나 모두가 죽어버린 지금은 이런 눈에 띄는 내 용모도 도망 다니는데 거슬리기만 할 뿐이다. 

 

 

얼마 전에 화가에게 오랜만에 답장을 보냈다. 그는 주야장천 내 편지만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이번엔 어쩌다 보니 답장이 늦었다. 

나는 편지에 J의 집으로 가고싶다고 썼다. 

 

 

내겐 두 명의 절친한 친구가 있다. 그녀들이 언제부터 내 친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아름답고 조용한 J와 순수하지만 질투심 많고 사악한 G. 

J나 G나 모두 가까운 친구들이었지만 G는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을 뿐인데 벌써 팔려가듯이 시집을 갔다.  

결혼식 날 신부의 얼굴은 밝았고 그녀의 유치한 허영심을 채울 만큼 돈이 많은 부잣집에 시집가게 되었기에 우리는 축복해주었다.

 

 

 

속을 훤히 내다보이는 G와는 다르게 J는 조금 대하기가 어려운 친구였다. 

J는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하고 아름다웠기에 하인들은 내게 그렇게 하듯이 그녀에게도 늘 아첨하고 미모를 칭송했다. 

하지만 시종일관 J는 누구에게나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했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갑게 굴진 않았다. 

 

 

J가 어려운 친구였던 이유는 그녀의 타고난  성격 한 가지 뿐이 아니었다. 

우리 중에서 그녀는 제일 부자였다. 집도 제일 큰 대저택이었고 하인들의 수도 많았다. 그런 점에 대해서도 늘 시니컬한 태도를 유지하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 집안이 한때 잘 나갈 때도 그녀의 집보다 엄청나진 않았다. 

 

우리 집은 나름 유서 깊은 집안이었고 왕가에 충성스럽고 늘 보수적이고 올곧은 태도를 유지했지만 결국은 모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나를 제외하곤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다. 사정이 매우 불행하게 된 나와는 다르게 그냥 우리나라에 적당히 비옥한 땅을 골라 어마어마하게 큰 집을 지어놓고 사업을 위해 체류하는 외국인 아비의 밑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런 사정과는 무관할 터였고 어떤 싸움에도 휘말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여차하면 가족과 식솔들을 데리고 이 나라를 떠나기만 하면 된다. 

 

 

J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그녀가 날 보고 웃어준 적도 별로 없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 집안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나라 안팎에 모두 소문이 난지 오래다. 그녀가 모를 리가 없다. 

그래도 G보단 훨씬 믿음직스러우며 J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겐 친구가 그 둘밖에 없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 생각을 적은 편지를 화가는 J에게 그대로 다시 보냈다고 했다. 

놀랍게도 J는 언제든지 나의 방문을 환영하며 다음 주 금요일에 G가 오랜만에 놀러 오기로 했으니 그때 나도 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짤막한 편지였지만 그 내용은 지쳐있는 나를 안심시키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G가 오는 건 조금 불안하다. 

우리 집이 그렇게 됐을 때 그녀의 남편도, 그녀의 부모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녀의 사악함이었다. 나는 얼마 전에도 G가 나오는 악몽을 꾼 적이 있다. 몇년 전 G는 반푼이 인 자기 오빠를 시켜 내 목을 장난으로 조른 적이 있었다. 기절하는 순간을 보고싶다는 이유였다. 듣기 싫은 웃음소리로 G가 깔깔대고 웃었다. J는 달려와서 화를 내며 그녀의 오빠에게 발길질을 했다. J가 그렇게 엄청나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봤다. 나는 병신같이 울기만 했다. 

 

-

 

며칠을 J의 집에서 빈둥대며 보냈다. 

내가 쫓기는 신세인 걸 잠시 동안 잊을 만큼 편안한 생활 이었고 더 이상 배가 고프지도 않았지만 이곳에 영영 머무를 순 없을 거라는 걸 알고있었다. 

그래서 나의 유일한 조언자인 화가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게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일 거라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다행히 G는 예전보다 훨씬 성숙해진 느낌이었고 밀고할 생각은커녕 아예 나에게 관심도 없는 거 같다.

 

 

J의 방 안에서 엎드려서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G가 자꾸 눈치 없이 누구한테 보내는 거냐고 물어봤다. 

편지에 그녀에 대한 내용도 있었으므로 나는 서둘러 그것을 감췄다. 

 

 

"너 이렇게 오랫동안 여기 있어도 남편이 뭐라 안 해?"

 

또 J가 날 위해 나서주었다. G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이는 나한테 관심 없어. 우리 둘 다 바람피우고 있고."

 

 

나는 그녀가 걱정되었다.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G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투덜대기 시작했다. 

"여기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 비린내 같은 거." 그러다가 발코니로 나가버렸다. 

여기도 유명한 사람이 그린 그림이 있어.하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나한테 냄새가 나는 줄 알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는데 잠시 후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G는 못 본 거 같았지만 소파 밑에 피 묻은 수건이 보였다. 

J가 무심한 표정으로 찐득해 보이는 피가 말라붙어있는 수건을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집어서 쓰레기통에 던졌다. 

 

 

"별거 아니야. 생리야."

 

 

나는 괜히 얼굴이 빨개져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도 할 때가 됐는데 나오지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가 않고 그런 거에 대해선 아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잘게 자른 수건을 계속 갈아주면 돼. 넌 아직도 안 하는 거야?"

 

"응. 아직."

 

"너무 못 먹어서 그런 거 같은데 여기 있는 동안이라도 실컷 먹어둬."

 

 

역시 이곳에서 계속 있을 순 없는 거겠지. 

나는 조금 서글퍼졌지만 여기 있는 동안 누릴 수 있는 것들, 조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 계속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이곳에 있으면서 게을러진 나머지 아직도 붙이지 못한 편지를 화가에게 보냈다. 

 

며칠 후 기다리던 답장이 왔다. 

 

 

"아무도 믿지 못할 상황이란 걸 알지만 J 아가씨같이 품위 있는 인격의 소유자는 가까이하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그분이라면 절대 아가씨께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실 테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습니다. 서로의 가정사에 대해 잘 알고 계시겠죠. 친구분이시니까요. 

그분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도 아시겠죠. 

곧 귀국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가장 먼저 딸을 보러 오시겠죠. 그리고 아가씨도 보실 겁니다."

 

 

편지의 다음 내용은 끔찍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지금의 내 상황에선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끔찍함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때 J의 심경 변화가 예상되었다. 

그녀는 날 증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증오를 넘어서서 혐오할지도. 

 

 

어느 날은 혼자서 화단에 있는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 속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역겹기 짝이 없는데. 

나는 J와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J의 아버지는 부유한 외국인 사업가다. 

어떤 귀족보다도 돈이 많았고 항상 여유로운 태도라 G는 그를 우스갯소리로 백작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 별명은 재치있다고 생각했으며 맘에 들어 했다.) J의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평생 놀고먹고 해도 될만한 재산이 있었다고 한다. 

J의 아버지는 (그녀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도 젊은 시절 다녔던) 명문 대학을 졸업한 후 재산을 더 늘리기 위해, 혹은 심심풀이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비슷하게 부유한 집안의 여자와 결혼해서 자신을 닮은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낳았다. 그러나 아내는 결혼 후에 생긴 우울증으로 고생했고 결혼한 지 정확히 15년째가 되던 해 자살해버렸다. 

 

누구보다도 부유하고 행복해 보였던 여자가 왜 자살했을까. 

그 이유는 서민들 가정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꽤나 흔하고 천박한 이유였는데, 역시나 남편의 바람기가 문제였다. 

백작은 남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여자, 특히 자신이 손쉽게 가질 수 있는 가난한 집안의 어리고 예쁜 여자들을 자주 만났다. 

그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J도 자살한 첫 부인에게서 얻은 자식이 아니라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운 좋게 낳은 혼외 자식이었다. 

J의 어머니는 마치 계획한 것처럼 꽤 많은 액수의 돈을 챙겼고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딸이 걸을 수 있는 나이도 되기 전에 다른 남자와 떠나버렸다. 백작은 그렇게 졸지에 고아가 된 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마흔 살도 넘어서 늦게 본, 그것도 남자형제들 중 유일한 딸이었기에 꽤 예뻐하며 키웠다. 

 

 

그러나 J는 자기 아버지가 자길 오빠들보다 특별히 사랑한다기보다는 그냥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를 예뻐하듯이 사랑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던 것이 J의 아버지는 항상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 동안 집을 비웠다. 

집을 비우는 동안은 무신경하게도 엽서 한 장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올 때가 되어서야 편지를 썼고, 가끔씩은 편지도 없이 갑자기 돌아와서는 그녀를 볼 때마다 외국 여기저기에서 사온 (그녀의 취향이나 흥미와는 별 상관도 없는) 선물을 안겨주곤 다시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우리 부모님은 어린아이에게도 지켜야 할 의무만 강조할 뿐 애정표현에 매우 인색한 분들이었기 때문에 한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난 한 번도 부모님께 선물 따윌 받아본 적이 없었다. 생일 선물조차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J의 아버지란 사람은 볼 때마다 말끔한 양복 차림으로 나타나서는 비싸 보이는 선물들을 한 아름 안겨주며 애정공세를 했고 그녀도 그럴 때마다 며칠 동안 기세등등하고 밝은 얼굴이 되었다. 

난 그를 동경했고 진실을 알고 나서 환상은 깨졌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봤는데 그는 내 첫사랑이었다. 

생각해보면 역겨운 일인데 어린 시절의 일이라 지금 상상을 하면 이상하게 되게 아름다운 추억처럼 그려지고 있다.

 

 

J는 언젠가부터 계모와 함께 살았는데 처음엔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얼마 못 가서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계모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평범한 여자였다. 그러나 고상하지도 않은 주제에 깐깐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J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J의 아버지가 이 나라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사귄 친구라는데 단순한 친구 사이가 아닌 건 그녀가 J 소유의 재산과 영지를 관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여기에 오래 머물기 힘들다고 느낀 것도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가끔씩 외출할 때 보이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 때문이었다. 내가 여기로 오기로 결정했을 때 나의 화가도 멍청한 G보단 그 여자를 더 조심하라고 편지에 덧붙였었다.

 

 

 

나는 이런 복잡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J가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방은 백작한테 받은 선물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집안 곳곳에 걸려있는 그림들도 대부분이 선물 받은 것들이었다. 특히 화단에 있는 풍경화는 그녀가 어릴 때부터 가장 아끼던 그림이었는데 다른 그림들에 비해 재미없어 보이는 그 그림을 왜 그렇게 아끼는지 나로선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그림의 가치는 아무한테도 내가 그걸 ‘말하지 않는 거’야."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했다. J는 평소와 똑같이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이 그림에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있는 거처럼 보이진 않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 거? 그래서 가치 있는 거라고? 그런 뜻인가?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J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아버지가 내일 도착하실 거래."

 

그렇게 말하면서 오랜만에 어린아이같이 미소 짓는 그녀를 보는데 무거운 죄책감이 밀려왔다. 

 

-

 

 

 

1편이라기보단 프롤로그?

이미 예상한 사람 있겠지만 세계관 구성 시망이고 세카이가 망하건 말건 우리는 백합 할 거야! 이런 내용이 될 거 같다. 

처녀작이니 너무 욕하지 말고 봐줘...

내 세계관은 지금 그림으로 비유하면 이 정도의 완성도야. 하지만 앞으로의 스토리와 캐릭터들의 관계성은 다 만들어져있음.

반응 보려고 올려봐. 연재해도 될지... 그냥 버려야 할지 고민이 되네;;



 

마침 프로크리에이트에 적절한 미완성작이 있었음.

2편 원하는 사람 1이라도 있으면 빨리 올릴게.

작품 등록일 : 2019-06-28
재밌다
no****   
그림 좋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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