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해석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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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처음 보았을 때 충격을 잊지 못한다.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둔 화자의 생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청춘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화자는 미래의 자신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본다.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한 적 없던 생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생이라는 오래되고 낡은 노트를 뒤적이며, 그곳에 문득 맥아리없이 떨어진 책갈피를 주워들고는 청춘의 질투를 떠올린다. 그들을 향한 질투가 그를 살린 나날들을. 오로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던 많은 시간을.

그가 희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이 되는 것.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 그의 희망이요, 생의 내용이었다. 질투가 어떠한 마음의 에너지, 사랑의 또다른 면이라면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느라 모든 생을 소진했다. 자기 자신을 희망할 수 없던 사람. 어떻게든 희망을 찾아다녔던 사람.

그러므로 그를 두려워했던 사람은 없다.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이며, 질투로 생을 연명하며,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을 사랑해달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내용은 그의 노트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반복된 일상을 마치고 귀가하는 화자는 저녁 거리마다 자기 자신의 과거를 본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현재의 모습,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미래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겹쳐 보인다. 너무나도 생생하게. 생의 유일한 희망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었으나, 결코 그 꿈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분명한 감각이 그를 사로잡는다.

책상 앞에 홀로 앉아 노트에 탄식을 적어 내려가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눈물을 쏟고 싶다. 떨어진 책갈피를 그의 손에 다시 쥐여주고는 그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지칠 줄 모르고 쏘다닌 것처럼, 나 또한 그러하였다고. 영영 보지 못했을 무언가를 맞닥뜨린 듯 무용한 청춘의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본 이들에게, 그런 문장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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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파란 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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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선 무게를 잴 수도, 따뜻함을 느낄 수도 없다. 다만 후회할 수 있다. 후회라는 건 살아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무기이고, 미련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화자는 파란 돌을 본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다. 십 년 전 꿈 속에서 본 파란 돌,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화자는 꿈꾼다.

꿈에서 화자는 죽어 있다.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사람이 되어 파란 돌을 본다. 가벼워서 좋아, 죽어서 좋아, 꿈속에서 산 자의 몸으로 그는 느낀다.

죽은 사람에겐 몸이 없다. 몸이 소멸하고 혼이 구천(九泉)을 향할 때, 그때 그는 희고 둥근 조약돌을 보고 망설인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손을 뻗어 저 아름다운 조약돌을 주울 것인가. 다시 육신을 불러와 견딜 수 있는가. 되풀이되는 아픔을.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하는데

다시 살아야 하는데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 놓친 적도 있을까 /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8연에서 화자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망설였던 기억을 더듬고 있다. 그는 과연 꿈속에서 다시 살아가기 위해 그 돌을 주웠고, 선잠이 든 그의 곁에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던 걸까. 결국, 생을 포기하지 않기로 선택한 걸까.

어떻게 그 아픔을 선택할 수 있지.

그는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을 그리워한다. 십 년이란 시간 동안 숱하게 미련 두었을 그것에 기대려 한다. 빛나는 냇물 아래를 들여다보며, 무겁게 짓누르던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가벼운 혼이 되어 조약돌을 헤아려본다.

꿈에서 깨어난 그의 눈가엔 눈물 자국이 흥건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죽음을 그리워하기라도 하듯. , 죽어서 좋았는데.

눈물가의 따뜻함으로 생의 의미를 깨우친 그는, 버리고자 했던 육신의 고통을 또 한 번 느낀다. 꿈에서 깨어난 것이 마치, 자신의 다짐이라도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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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영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키스를 매달고 달리는 버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정류장에서 키스하는 소년소녀를 본다

소년은 직행버스를, 소녀는 완행버스를 타고

 

다음 정류장엔 무엇이 보관되어 있을까

나는 앉아서 어딘가 열심히 가고 있다

먼 곳에서 돌아와 다시 먼 곳으로

 

행복의 야금술(冶金術)로 골라낸

기억을 믿으면서

누군가의 심장 속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덜컹덜컹

종점은 아직 멀었겠지?

 

그래도 꽃과 새처럼 아름답게 울고 헤어졌잖아

5분이나 10분 간격으로

질주와 정지를 반복하면서

 

새의 창자에서 추출되는 아름다운 울음과

꽃의 소용돌이에서 추출되는 흰 시간들

영원을 껴안았지만 영원히 사라져버린 사랑이 있다

소녀는 이쪽으로, 소년은 저쪽으로 가고

 

서로를 잊었겠지

어른이 되어가면서 노인이 되어가면서

고독의 힘을 느끼면서 말이야

어렴풋한 영원을 지키려고

구름 위에 착지하는 법을 혼자 익히며

몇 년이 지났을까? 10, 20

아직도 서로를 잊는 중이겠지

 

버스 유리창에 키스의 무늬가 찍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무늬를 영원히 매달고 울어야 하는 마음처럼

행성 하나가 달려와 정류장에 멈춘다

나는 그때마다 유리창에 비치는 소년소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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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순간은 두 사람의 영원이 포개어지는 장소다. 저 사람의 영혼과 이 사람의 영혼이 영원이란 약속 없이 영원을 맹세하는 시간. 화자는 버스정류장에서 그 순간을 발견한다. 한 사람은 정차역 없는 직행버스에, 한 사람은 모든 정거장을 천천히 들르는 직행버스에 앉아 있다. 도저히 만나지지 않을 것 같지만 마주쳤던 소년소녀. 영원히 묶여있으리라는 기대로 키스하는 두 사람. 지금 이 순간에도 영원히 사라지고 있을 그 순간은 버스 유리창에 매달려 있다.

화자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먼곳에서 다시 이곳으로 영원 속을 떠돌며 사랑의 순간을 포착하는 중이다. 그 모든 순간들은 다 어디서부터와서 어디로 사라지는가. 그는 그것을 애타게 찾으면서도 냉담하고 무심히 지켜본다. 그저 사랑이 줄 수 있는 행복의 조각들 중 하나를 고를 뿐이라는 심정으로. 그러지 못한다면 사라지는 모든 것을 어떻게 직면할 수 있을까.

5분이나 10분 간격으로 / 질주와 정지를 반복하면서

사랑의 과정에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연인 사이의 다툼과 만남을 그는 버스의 움직임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새의 아름다운 울음과 꽃의 소용돌이로 소년소녀, 우리들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는지 묘사한다. 새의 가장 깊숙한 곳(창자)에서부터 추출되는 울음은 소년소녀가 사랑하며 흘려야했던 눈물이었을까. 사랑할 때 비명처럼 나는 울음소리를 새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바꾸어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꽃의 소용돌이는 시간의 영원함을, 순백의 흰 시간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의미하는 걸까. 결국 그들이 꿈꿨던 영원은 빈 공간 속으로 빨려들어갔으니.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하얀 구름의 이미지는 정착할 수 없는 공간처럼 보인다. 착지할 수 없지만 그곳에 착지하기를 연습하는 두 사람은, 영원을 지키는 일과 떠다니는 구름을 붙잡는 일을 동일시한 것일까.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를 껴안거나, 완전한 잊음에 도달하거나. 아쉽게도 무엇도 불가능한 일이다.

사랑은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는 것. 영원히 볼 수 없을 것만 같던 두 남녀가 만나 영원같은 키스를 나누는 것. 그 흔적은 사랑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지지만, 우습게도 영영 지워지지 않는 것. 화자는 영영 지워지지 않는 그 순간을, 사람들과 덜컹이는 버스에 함께 올라 지켜본다. 때마침 아직 우리가 사랑을 나누던 그 행성이 정류장에 도착하고, 우주의 모든 순간이 사랑의 순간으로 수렴할 때, 화자는 두 사람이 아직 뜨겁게 사랑하던 때를 목격한다. 아직 두 사람이 서로를 잊지 않았던 때로. 불가능이 가능해지던 그 순간으로

작품 등록일 : 2025-12-13
최종 수정일 : 202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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