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nging Case
마음의 평화를 얻기까지 그가 겪어야 했던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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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일단 생각이란걸 하지 마요. 지적 자살을 해. 생각하는 나는 죽었어. 나에게 남은 것은 몸뚱이 뿐이다."
"네.. 갑자기 닥쳐있던 문제들이 다 간단해보여요. 신기하다. 감사해요."
"그냥 오지랖인데 어머니가 자식들 열심히 키우셨는데 더 잘 되면 좋겠어요. 고생하신거 희생하신거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면 좋겠어. 이대로 포텐셜 못 터뜨리고 후회 남기면 내가 너무 슬퍼요."
"저도.. 엄마 행복하면 좋겠어요. 이런 선배 있다고 하면 엄마 우실것 같네요."
"이렇게 해보자. 그대가 열심히 살아. 어머니가 '너 요새 왜 이렇게 열심히하니?' 하면 아는 선배가 그러랬다고 해요."
"네 꼭 그럴게요."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나는 살아있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36.
결국 또 죽지 못했다. 완전히 취해서 필름이 끊겼으면 성공했을수도 있는데, 평소에는 소주 한병을 한번에 들이키면 정신을 잃고는 했으면서 어제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살고 싶어서 몸이 발악한 건가.
37.
목이 너무 말라서 일찍 깼다. 숙취 해소제를 세개나 때려박고 잤더니 정말로 숙취가 별로 없었다. 아침 일찍 나가서 갈 때마다 품절이라 못 먹던 모 카페에 가서 뱅쇼를 마셨다. 따뜻하다. 그래 나는 살아있다. 살아서 오늘을 맞이했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다. 이거면 됐어. 이거면 된 거야..
38.
인생을 어떻게 살 건지는 선택 가능하다고, 살아있으면 된 거라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또다시 상태가 나빠졌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걸까? 깨진 유리병을 치우다가 나도 모르게 파편 하나를 손에 쥐고 손목을 그었다. 같은 곳을 여러 번 긋고 나서 드러난 피부를 손으로 벌리고 방울방울 피가 맺히는걸 보다가 그만뒀다. 알코올 솜으로 상처를 닦으니 그제야 아픔이 몰려왔다.
내가 죽는다면 어머니가 가장 슬퍼할 것임을 안다. 언젠가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실 수 있을까? 슬픔에 잠식되어 내가 죽는 그 순간에 영원히 머물러버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시는 딸의 이름조차도 떠올리지 못하는 백치가 되어 여생을 보낼지도 모른다.
피를 씻고 나서 문에 노끈을 걸다가 그만뒀다. 어머니 때문만은 아니다. 무서웠다. 죽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상황을 차근차근 하나씩 해결해나갈 능력이 없어서 죽음을 떠올리는 것뿐이다. 분명 후회할게 뻔한 선택은 그만두고 반드시 살아 남아야 한다.
39.
"생각해보니 창작하는데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평가가 오히려 좋지 않은 쪽으로 영향을 줄 수도 있을거 같아요. 반응이 별로 없어도 이제 마음이 괜찮을 수 있을거 같아요."
"그래요. 가장 중요한건 내가 쓰고 싶고 내가 재밌다고 생각해서 써야하고 그 뒤는 어떤 평가가 있든 없든 물 흐르듯이 보내주면 되요. 언제나 당신의 작업을 응원합니다. 당신은 정말 정말 잠재력이나 가능성이 많아요. 다만 늘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고민과 감정에 빠지기 쉬운뿐. 이건 아마 창작자 뿐만 아니도 모두의 인생 최대의 딜레마겠네요. 그걸 스스로 다독이고 조절해가면서 계속 글을 써가면 됩니다. 이건 내가 나한테도 하고 싶은 말이에요."
나도 서른 두 살이 되었을 때 누군가에게 저렇게 따뜻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스물 네 살인 나는 나보다 어린 갓 스물 된 후배들을 붙잡고 삶이 괴롭다며 하소연하고 훈계하는 괴물이다. 모두가 기피한다.
40.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요즘 글을 쓴다고 하니 읽어보고 싶다고 해서 헤어질 때 링크를 보내줬다. 몇 시간 후 잘 읽었다며 공부가 잘 안 될 때는 밖에 나가라며 음료 교환권을 선물로 보내줬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
41.
마이클의 부모님은 알바트로스처럼 서로 지구 반대편에서 지내면서도 여전히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계신다. 오랜 기간 함께 살았고 자식들도 여럿 봤고 법적으로 부부관계로 묶여있기 때문에 헤어지지 않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마이클에게는 한국 내에서 장거리 연애는 멀다는 핑계가 될 수 없었다. 물리적으로 멀어지면 마음도 어느정도 멀어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이클이 먼저 헤어지자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아마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 배신하지 않는 이상 평생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자꾸 무엇이 불안한 걸까? 무능력해서 자립하지 못할 것 같다는 걱정이 전부인가? 관계를 유지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거의 보지 못할 미래가 예상되기 때문에?
42.
며칠 동안 전기장판까지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서 깨기를 반복했다. 꿈에는 어머니가 나왔다. 많이 피곤해보이는 기색으로 나도 지쳤어, 언제까지 내가 뒷바라지 해줄 수는 없어, 엄마도 힘들어, 나도 이제 늙고 지쳤어.. 라고 말하는 모습에 덜컥 불안했다. 꿈 속의 나는 현실과 다를바 없어서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숨죽이고 있었다.
붕대 속에도 땀이 나서 기분이 나빴다. 답답하고 간지러워서 여간 짜증나는게 아니다. 내가 죽으면 엄마도 해방될까?
문득 해부학 시간에 교수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간혹 손목을 덜렁거릴 정도로 잘라서 실려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정말 죽을 작정을 한 거니까 애써 살리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정도는 해야겠지. 날이 잘 드는 칼을 써야겠다.
43.
"지난주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냥.. 괜찮았어요. 오늘은 이번주 금요일에 대학병원 진료 예약되어있어서 의뢰서 받으러 왔어요. 음.. 요즘에는 또 괜찮은데 예약한건 벌써 한달 전이라 가서 한 달 전 입원 권유하실 때의 상태를 말해야 하나요, 지금 상태를 말해야 하나요?"
"한 달 전에는 어땠는지도 말씀드리고 지금은 어떤지도 말씀드리세요."
"네 그럴게요."
"약은 4일치 드리고 처방전이랑 의뢰서 써드릴게요."
"네. 안녕히계세요."
진료실을 나서 쇼파에 앉아서 멍하니 있었다. 차례가 되서 수납을 하고 관련 서류를 주섬주섬 집어들어 가방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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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전>
651902560_뉴프람정 10mg
668100030_미르탁스정 30mg
651903290_뉴로자핀정 2.5mg (올란자핀)
643702360_트리티코정 25mg
645302630_한림알프라졸람정 0.25mg
649900250_아빌리파이정 2mg (아리피프라졸)
<의뢰서>
-상병분류기호: F32.2 정신병적 증상이 없는 중증의 우울성 에피소드
-환자 상태 및 진료 의견: 상기인은 주요우울장애로 약 2년 전부터 본원에서 치료 중인 환자로,
과거부터 자살사고가 있어 타이레놀을 과다복용하거나 가위로 손목 피부를 자르거나 유리 조각으로 손목을 그은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학업 등의 스트레스가 있으면서 우울, 자살사고 등의 증상의 악화가 있어, 올 10월 들어 수차례 hanging을 시도하여 이에 대해 적극적인 치료를 위해 입원 치료를 필요로 하므로 상급병원에 의뢰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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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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