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은 손
" 서랍 안에 칫솔 좀 갖다줄래? " 

세면대 앞에 언니가 탄 휠체어를 고정하고는 
병상으로 가서 옆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쪼그라든 압박 타이즈, 쑤셔 넣은 수건, 각종 비닐이며
지저분하고 제멋대로 널브러진 물건들 사이로 꿉꿉하게 돌아누워 있는 칫솔이 있었다.

언니에게 건네기 직전에 칫솔모 사이로 뒤엉킨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눈살을 찌푸리면서 오른손의 검지와 엄지로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끌어당겼다. 
쭈욱- 밀려 나오는 3센치 가량의 머리카락은 고불고불했다.

치약을 푹 짜서 언니에게 쥐여주고는 돌아서서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이를 닦는 소리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역겨운 칫솔, 
울렁거리는 속이 진정되지 않는다.
도망치듯 보온병을 들고 나가서 정수기에 시원한 물을 받았다.

어쩌다가 오른 발목이 부러졌는지.
물어보지도 못할 거면 여기까지 왜 왔는가.
입이 까끌까끌할테니, 시원한 물이 마시고 싶겠지.
그다음 물어봐야지.
다짐하면서도 속은 계속 메슥거렸다.

병실에 돌아오니 언니는 통화 중이었고 차분하고 조곤조곤 말을 하면서도 눈빛은 쓸쓸했다. 나는 몇 번이고 언니의 휴대폰을 박살 내는 상상을 했다. 
그 남자와 인연이 끊기길 바라며.

인기척을 느끼고 언니는 슬며시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내가 옆에 올려둔 보온병의 차가운 물을 벌컥 마셨다.

" 바람이 쐬고 싶네, 옥상에 갈까? "

옥상은 싸구려 병원이랑 어울리지 않게 한껏 꾸며져 있었다.
펜션에서 볼법한 통나무로 만든 4인용 테이블과 고운 빛을내는 조약돌로 짤막한 오솔길을 흉내 내고 그 주위를 이름 모를 꽃들이 산들거리며 에워쌌다. 


" 어제 퇴원한 아줌마 말이 맞았네. 옥상이 제일 예쁘다."

잠시 우리는 얼굴로 쏟아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석양을 바라봤다.
언니는 있는 힘껏 공기를 들이마시고는

" 눈이 부시다. "

" 자리 옮겨 줄까? "

" 아니. 눈이 부셔서 너무 좋다."

나는 휠체어 손잡이를 양손으로 꾹 눌러 잡고는 다시 힘을 뺐다.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한 느낌이다. 

" 그 사람이 보고 싶어.
  ... 알아.. 나도 내가 경멸스러워."

뒤에 서 있는 내 눈빛을 보지 않아도 읽었다는 듯 말하지만,
틀렸다. 지저분한 소송 중에도 여전히 그 남자를 사랑하는 언니가 미쳤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내게 불륜 사실을 처음 고백한 날, 

언니는 그럴 그릇이 못 된다고,
반드시 그 남자는 뒤통수를 칠 거야.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던 언니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마치 정해진 비극이라며 보란 듯이 저주를 퍼부은 거 같아서. 
뱉은 말보다 더 지독하게 고통받고 있는 언니를 보며 가슴이 무너져내린다.

한편으로 언니의 인간관계도 사회생활도 모두 처참하게 박살이 나고도
이제 짝다리로 절뚝거리며 걷게 될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걸까, 내 앞에서.

" 됐어. 더는 말하지 마. "
 
" 난 늘 너한테 고마워.. 
  네 앞에서는 늘 솔직할 수 있었어.."


그 솔직함이 무겁다. 감당이 안 되는데, 
이제는 솔직하게 다 말하지 말라고.
사람들은 버젓이 대학원까지 나온 여자가 불륜을 한다고 했다.
언니와 그 남자를 지켜본 모든 인간이란 인간들이 
언니에게 연락해서는 
그래선 안된다며 천벌 받는다며 자기들이 화를 내기도 하고 타이르며 사람다운 상식을 가장한 정신착란을 토해냈다. 

그것들을 일일이 다 받아내는 언니의 모습을 보자니 너무나 화가나,
휴대폰을 뺏어서는 남의 일에 참견들 하지 말라고 고래고래 악을 쓰고 소리를 질러댔다. 왜 나까지 정신착란이 되어버리는 것인지. 
언니는 괜찮다면서 다 그럴만하니 그러는 것이라고, 인과응보라 했다.

인과응보 따윈 없어. 
왜 그걸 스스로 자처하는 거야! 멍청하게!

나는 또다시 맹독을 품은 가시 같은 말로 비수를 꽂았다. 
곧바로 후회했다. 나는 계속 후회했다. 
나마저 그것들처럼 하면 안되잖아. 
언니의 괴로움에 한 줌도 보태지 말자고, 
알면서 안되는 것이다. 


" 바람이 차다. 내려가자 언니."

" 너무 혼자 잘 지내지 마. 
  적당히.. 어울리고 적당히.. 멀어지고..
  고양이도 적당히 좋아해. "

나는 목이 메어서 말을 잇지 못하고 휠체어를 밀었다. 

언제부턴가 언니는 내 손을 잡지 않는다. 
아마 그 남자의 손도 잡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하염없이 말하고는 스르르 손을 놓아버린다.
  
" 덕분에 드디어 옥상에 왔네.
  다시 병실로.. 하하. 집에 가는 기분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행복이다. 그지? "

조용히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만 끄덕였다. 

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달라고 했지만,
세상은 미련한 여자 이야기는 관심이 없다고.
나는 미련한 여자를 사랑하지만. 

작품 등록일 : 2020-06-17
애프턴 강이여 푸른 둑 사이를 고요히 흘러라
그대 기리는 노래를 부르니 고요히 흘러 내려라
물살 지으며 흐르는 애프턴 강 곁에는 내 사랑 메리가 잠들어 있으니
아름다운 애프턴 강이여 메리의 잠을 깨우지 말고 고요히 흘러라
https://www.youtube.com/watch?v=YKnn1kBaf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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