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결혼 안 할건데?"
장난으로, 하지만 기대를 한아름 안고 떠본 말에 처참한 답변이 돌아왔다. 어색하게 웃으며 농담이라고 얼버무리고 화제를 바꿨다. 굳은 채로 팔에 안겨 누워서 넷플릭스를 틀었다. 잘 훈련된 개와 같은, 목줄이 없어도 자신이 정해놓은 선에서 한발짝 내딛는 것을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는 곁눈질로 함께 보는 것 같더니 어느새 코를 골고 있었다.
'어제 많이 피곤했나보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면전에서 너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들었으니 조용히 다른 남자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남자를 내가 과연 또 만날 수 있을까? 벌써부터 절망스럽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그를 꼬옥 껴안았다. 잠을 자보려고 했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다시 영화를 틀고 보았다. 남주인공이 내린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결정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재밌어?"
어느새 그가 깨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보고 있었다.
"응. 슬퍼."
아까 네 말을 들었을 때의 내 마음처럼.
"생각해보니까 교수 되기 힘들 것 같아."
"갑자기 왜?"
"교수되려면 5년 전에 학부 졸업을 해야했어. 지금 인원수 엄청 많이 뽑고 있거든. 그래서 나 때는 자리가 없어."
"5년 전에 태어날 수는 없잖아."
"고등학교 1년 조기졸업을 하고 재수 1년을 안 했고 계절학기 들어서 대학도 조기졸업을 했으면 지금 박사 졸업할 수도 있는데."
"생일도 빨리 태어나고?"
"그건 내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거고. 나머지 세 개는 내가 노력했으면 할 수 있는 건데."
"그래?"
"응. 그래서 회사에 가야해. 회사에 가서 일하다가 교수가 되는거야."
"그렇게 되기도 해?"
"응. 오히려 바로 교수되는거보다 이런 경우가 더 많을걸."
"그렇구나."
"근데 한국에 있는 기업 들어가는거로는 안 돼."
"그러면?"
"애플이나 구글에는 들어가야지."
"너도 좋은 친구처럼 잘 할 수 있을거야."
"걔는 너무 천재야."
"그럼 크라사카."
"크라사카도.. 아니다. 그게 그나마 더 쉬울라나?"
"그럼 졸업하고 미국 가?"
"응. 안녕."
"장거리되는거야?"
"헤어지겠지."
"뺨 때려도 돼?"
"응?"
"5년 후에 헤어진다고 예고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까 지금 때려도 될 거 같아."
"내가 때릴 건데?"
"뭔 개소리야. 헤어지고 뺨까지 때린다고?"
"히히히."
순간 충동적으로 차라리 지금 헤어지자는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꾹꾹 눌러담았다. 얘는 왜 나를 울리는 말만 하는 거지?
"그래서 돈을 아껴야해. 한 달에 33만원만 쓰면서 버티면 대학원생 월급으로 5년 후에는 1억을 모을 수 있어."
"와 되게 많이 모으네. 나도 해야지."
"나는 집에 살아서 방세랑 생활비 안 드니까 가능한거고. 너는 아니잖아."
"그걸로 뭐할건데?"
"집 사..려면 서울에서는 안 되겠군. 생각보다 1억이 큰 돈이 아니야."
"왜?"
"도곡 집도 40억짜리인데 전세 내놓아서 그나마 20억 정도였어."
"와."
"근데 그정도면 그렇게 비싼거도 아니야."
"정말?"
"응."
그 뒤로도 계속 미국 가서의 삶과 못 갈 경우 서울 근교에서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벌써 8시네. 이만 갈게."
"잘 가."
현관이 닫히자 정적이 흘렀다. 오늘 나눈 대화를 곱씹을수록 우울해졌다. 다시는 결혼 얘기 꺼내지 않을거야. 다시는 좋아하지 않을거야. 슬퍼지자 배가 너무 고팠다. 며칠 전 산 고기를 굽는데 훌쩍거리다가 결국 눈물을 뚝뚝 떨겼다. 나쁜 새끼.. 젖은 밥을 다 쳐먹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새 새벽 3시였다. 주섬주섬 침대로 기어가 눕자 대자 곧장 잠이 쏟아졌다. 잠깐 캄캄해진 것 같더니 눈을 떴을 때는 정오가 다 되어있었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켰다.
[김혁진] [오전 10:46] 아직도 자는거야?
맞다, 점심 같이 먹기로 했었지. 너무 늦게 일어났나 생각하면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일어났어. 어. 1시에 가게 앞에서 만나자. 응, 이따봐.
'씻기 귀찮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문지르다가 끙끙대며 일어났다. 머리 감겨주는 로봇이 나오면 좋을텐데. 뚱하게 씻고 나서 부은 눈으로 거울을 쳐다보며 가르마를 만들었다. 빗질을 하는 여자는 어딘가 울적해보였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혼 할 생각이 없다는 말도 들은 마당에 굳이 예쁘게 차려입을 의욕도 없어져서 대충 지난번에 만났던 그대로 긴 바지에 티셔츠를 주워입고 나갔다. 건물 현관을 나서는 순간 햇살에 눈이 찌뿌려졌다.
'더워..'
버스를 탔는데 햇빛이 너무 강하게 비춰서 한쪽 열이 모두 비어있었다. 에라모르겠다 앉았더니 조금 지나자 피부가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출발 했어?"
"응. 시간 딱 맞춰서 도착할 거 같아."
"알겠어. 나 먼저 도착했는데 건물 안에서 만나?"
"응."
"몇 층이지? 지하 1층인가?"
"푸드코트 찾아보면 있지 않을까?"
"알았어. 찾아볼게."
"응. 이따봐."
통화가 끝나고 어째서인지 한숨이 흘러나왔다.
'끝이 보이니까 그런 거겠지.'
심란한 마음으로 턱을 괴고 창 밖으로 풍경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제 밤부터 자꾸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며칠 전 지나가듯이 먹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가 오늘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다. 관계를 지속할 생각도 없으면서 대체 왜 나한테 다정한 거야?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그는 습관처럼 또 장난을 쳤다. 그 손길이 친근해서 입술이 일그러졌다. 마스크로 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밥 먹고 지하철로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보자고 했다. 그는 알겠다고, 하지만 해야할 일이 있어서 3시쯤에는 헤어져 집에 가야한다고 했다.
음식을 먹는 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중간에 맛있다고 활짝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지만 그 속에 있는 우울함을 그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다 먹고 나서 우리는 지하철을 타러 갔다. 전시는 일본풍 춘화 같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하는 것인데 꽤 유명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림 보는 눈이 없는 막눈에 비주얼 콘텐츠에 대한 취향도 없었지만 전시 공간에 가는 것은 좋아했다.
늦게 자서 그런지 가는 동안 눈이 감겼다. 피곤하지만 잠은 들지 못했다. 어차피 축 가라앉은 모습을 보일 바에는 차라리 혼자 갈 걸 그랬나 후회가 들었다.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몸이 좋지 않은 걸까?
전시는 반쯤 만족스러웠다. 그림은 취향이 아니었지만 전시장 밑층에 있는 딸린 카페 공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책을 읽고 그는 핸드폰을 하면서 한시간쯤 시간을 보내다가 나왔다.
"어느쪽으로 가야하지?"
"잠실역은 이쪽인데 난 반대로 가야해."
"왜?"
"인사동에 맛있는 약과 파는 곳이 있대. 여기서 40분 정도 버스 타고 가야해."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다음 주말에 봐."
"응. 잘 가."
인사를 마치고 미련없이 등을 돌리는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뒤를 돌아 버스 정류장으로 향해 걸어가면서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다.
'어제 밤에 내 마음은 죽었어. 다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거야.'
버스 타고 이동하면서 나는 대체 왜 항상 심심한 걸까 생각을 했다. 공부를 해도 글을 써도 등산을 해도 음악을 들어도 명상을 해도 영화를 봐도 산책을 해도 절에 가서 108배 50일 치성을 드려도, 시내버스를 타고 몇 시간 동안 서울 시내를 여행하다가 아무 카페나 들어가서 뭉개고 있어도, 칵테일바 가서 바텐더를 괴롭혀도 근원적인 슬픔과 외로움은 도무지 가시지를 않는다.
근무를 시작하면 체력 고갈되고 몰두해야할 거리도 생겨서 어느정도 해소되기는 하겠지만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닐테고.. 행복하고 싶다기 보다는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된다. 그냥 남들보다 섬세하게 타고난 거라고 받아들이고 다 추억이니 활기차게 살라고 하니 그렇게 해야지 하고 살고 있기는 하지만..
'답답해.'
달리는 버스에서 시원하게 풍경이 지나가는 광경을 보아도 목이 콱 메였다.
'다음 생리가 끝나면 곧장 병원에 가야지. 피임기구 시술을 받아야겠어.'
나는 절대로 새끼를 치면 안 되는 유형이다. 제 한몸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충동적으로 책임지지도 못할 자식을 낳았다가는 남은 인생이 불행해질 것이다.
'결혼도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는 짓이니까 독하게 마음 먹어야해. 이번에는 절대로 번복하지 않을거야. 창문을 살짝 열어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쐬면서 다시 한 번 다짐을 했다. 더 이상 울지도 않을거야.
버스에서 내려서 10분 가량을 걸어가자 찾던 화과자 가게가 나왔다. 일본풍이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는 건물이었다. 네모난 약과 4개짜리 2세트를 달라고 했다. 근처 카페에 가서 차를 한 잔 시켰다. 직원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꺼내 먹으면서 최근에 읽고 있던 시나리오 작법서를 꺼내 이어서 읽었다. 외부 음식을 꺼내는게 조금 미안하고 민망했다. 두어시간쯤 있다가 집에 돌아왔다. 맥주 두 캔을 따서 마시면서 유머 사이트의 익명게시판에 글을 썼다.
*제목: 대화하다가 장난식으로 결혼 얘기 꺼냈는데 너랑 결혼 안 할건데? 라고 정색하면
*내용: 씨발새끼하고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 만나면 되냐... 사귄지 5년 동안 비슷한 일 몇번 있었는데 전부 다 대답이 결혼 안 할건데, 너랑 안 할건데 였음. 매번 기대하고 상처받는 내가 싫다
*댓글 (19)
-으 그런사람 너무 싫어
-응..상대는 결혼생각없고 너는 하고싶으면 헤어져야지.. 5년이나 사귀었다니 너무하네 상대방도..
-니가 결혼생각 있으면 손절하고 아님 엔조이 하고
-헤어져걍 선존나긋네 사귀는와중에
-너는 환승하기 전에 잠깐 들르는 정류장이라는 말을 참 당당히도 하네
-몆살임? 이제 결혼 할 나이면 헤어지고 20대 초중반이면 잘 지내다가 헤어지셈 ㅋㅋ
ㄴ작성자: 둘다 28이라 결혼생각하는게 김칫국이고 빠르기는 한데... 그래도 그거랑은 별개로 나는 얘랑 평생 같이 있을줄 알았는데 상대는 아니라는게 매번 너무 충격이고 슬퍼
ㄴ그맘은 이해 하는데 ㅋㅋ 싫다는애 붙잡고 해도 난리여 ㅋㅋ 서로 맘맞아서 결혼생활 하는것도 힘들어보이는데 뭘 싫다는애랑 하고 있어 천천히 맘 접으셈
-ㅋㅋㅋ 5년만나고 그런말 듣는다? 헤어져
진짜 아니라면 끝인거고 너가 좋아하는게 보여서 일부러 반대로 말한거였다면 돌아오겟지만 그러면 나쁜사람이니까 그냥 헤어져
얼마나 좋아서 그러는지 모르겟지만 5년만난 사이에 그런 얘기 오가는거 보면 이대로 쭉간다고 결혼할거같진않은데? 차라리 헤어져서 다른 사람만나보거 하는게.더 나을수도 판단은 본인이 하는거겠지만
-시간낭비아니냐 ㅋㅋㅋㅋㅋ 헤어지셈
나이나 햇수 같은 디테일은 조금 바꿔서 말했지만 결론은 같았다. 상대는 너를 좋아하지 않으니 더 늦기 전에 헤어지라. 짐작은 했었어도 확인사살 투성이에 마음이 아팠다. 스무살 때의 기억이 재생되는 것만 같았다.
=후기=
07.05.일
아 쓰다가 지치네. <어떤 연애> 다음 에피소드 중 하나로 쓰려고 했는데 중간 연결이 잘 안 되서 아예 따로 떼어버렸어. 혐오스러운 마츠코 같은 느낌으로 장편화 하고 싶은데 쓰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할 듯. 남자 경험도 너무 부족하고.. 관리자한테 돈 내고 코멘트 받기 기능 있으면 좋겠다.
+07.07.화 뒷내용 추가함. 어떤 연애가 20살 때를 다룬 1화, 이번편은 3화나 4화 자리에 들어갈듯.
훙냥후냥후: 미완성작 올리는거 마음이 되게 불편했는데 다행이다. 존버하면서 가닥가닥 모아볼게. 고마워!
!!: 정말? 기쁘다..!
아직 이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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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에 태어날 수는 없잖아. '답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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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 | ||
나도 언니 글 너무 좋아
뚝뚝 끊겨도 돼 일화처럼 되있어도 감정이 다 느껴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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