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수능을 준비하는 공부 하나도 안 했으면서 두려움은 시시때때로 느꼈다.
아무런 생각도 의욕도 없다가 시험 날짜가 다가오고
모두들 어찌 되었든 수능 공부만 오지게 하고 있지, 뉴스든 주변에서 디데이 쾅쾅 찍어주시니 어쩔 수 없이 엉덩이 붙이고 앉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맨 발바닥으로 뭐하나 홀로 해본 적 없는 흙수저라 온실 속 화초 그 자체였다.
눈에 보이는 남들 하는 대로 말고는 다른 삶의 방식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나름 생각이라는 걸 하다보니 영어만 공부하기로 했다.
" 하루 종일 영어만 할 거야? "
호리병 여자애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 옹냐 "
" 안돼! 그럼 인서울 4년제 못 가잖아!"
" 그럴 생각이면 진작에 공부했지"
" 벌써부터 체념하면 안돼, 같이 하자!"
내 손을 꼭 잡고 같이 하자 말하는 그녀가 너무 귀여웠다.
어찌나 긍정적이신지, 공부는 정말 하고 있는 건지,
쉬는 시간 틈틈이 빵이랑 과자를 먹어대더니 가슴이 더 커졌다.
다가올 시험이 무섭고 숨 막히는 바보 같은 내 모습이 창피하고 싫었지만, 그녀가 위안이 되었다. 우리가 도긴개긴이라 였을 수도 있고, 낙관적인 왕가슴의 푸근함일 수도 있고
오히려 영어 하나만 하기로 하니까 마음의 무게가 좀 가벼워졌다. 그래도 백지상태에서 하려니 발작해대며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백하기로 했으니까,
그러고 나서 실컷 가슴을 만져줘야지.
무슨 자신감인지 호리병 여자애가 흔쾌히 사귀겠다고 할 거 같았다. 그렇게 계속 행복회로를 돌려가던 나날에 예상치 못한 소식이 들려왔다.
수능시험이 일주일 남았던 어느 날,
호리병 여자애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무작정 집에 찾아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괜히 휴대폰은 없애서 연락도 못하고 애가 탔다.
그사이 학교에는 소문이 돌았다.
호리병 여자애가 학원 선생님이랑 연인 사이였고 학원 옥상에서 섹스하다 걸렸다고 했다.
그걸 본 학생이 있어서 학원이 발칵 뒤집어졌다고,
속없는 여자애들이 나에게 물었다.
" 너 알고 있었어? "
"..."
" 에고, 너도 몰랐어? 정말? "
"..."
" 하긴, 걔가 남자 존나 밝혔잖아, 한두 명이 아니니까,"
" 너도 남자 밝히잖아."
싸움닭 본능을 되살려 그날 또 한바탕 여자애들하고 푸닥거리했다. 시험 전날에 분위기 좆같이 만들었다고 담임한테 혼나고 도저히 수능 볼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니,
왜 나한테 그 학원 선생 이야기는 안 한 걸까.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한 건 어떤 식으로든 연락 한번 안 하는 거, 왠지 다 내 잘못 같았다. 내가 휴대폰이 없어서..
나한테 연락하고 싶을지도 모르는데.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마음이 아팠다.
수능이 끝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호리병 여자애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알바를 하며
시간을 죽였다.
졸업식, 설마 하는 기대감으로 학교에 갔지만
그녀는 없었다.
다들 홀가분한 얼굴로 학교를 떠나는데 혹시나 하는 구질구질한 마음으로 남았다.
여름 내내 점심 먹고 배드민턴을 쳤던 실내 체육관에서
졸업식이 끝나면 함께 짜장면이나 먹자고 분위기 팍 떨어뜨려놓고 알바해서 번 돈으로 산 별자리 목걸이를 주면서 사귀자고 하려고 했지.
두 번 다시 너 같은 왕가슴은 만나고 싶지 않다. 정말...
끝나고 교문 앞에서 기다린 건 B였다.
B가 사귀자고 했고, 그러자고 했다.
아무런 고민도 생각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물 흐르는 듯 지냈다.
예상했다.
얼마 후 동창들이 호리병여자애가 결혼한다고,
12살이나 많은 학원 선생의 아이를 임신해서 부랴부랴 식을 올리며 반 여자애들을 초대했다는데, 누군가 나에게도 오라고 했지만 애초에 갈 맘이 없었다.
나도 그녀도 서로의 휴대폰 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fin.
에필로그
B와 헤어지고 싶으면서도 헤어지고 싶지 않아 미쳐가는 와중에 알바에서 S가 빡치게 했다.
A는 예쁜 여자친구가 생겼고 한 번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J는 5살 연하 여자친구가 생겼고 가끔 밤마다 연락해왔다.
호리병여자애가 아들 돌잔치에 오라고 직접 연락을 해왔지만 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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