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10번 퇴사한 이야기, 두번째

#3

 

그렇게 퇴사를 하고 나니 좀 허무해졌다. 다음엔 뭘 해야 하지.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지. 아니,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맞긴 한 건가? 엄마는 계속 공무원 준비를 하라고 말했고, 학교 친구들은 대부분 광고회사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었는데, 다들 힘들다고 말했다. 그 때는 정말 뭐가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지? 고민하던 중 우연히 프랑스인 친구가 생겼다. 역삼역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친구가 언주역 어떻게 가냐며 말을 걸었고, 신호가 무지하게 길었던 덕분에 같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 쯤엔 카톡 아이디를 교환하고 또 보기로 약속까지 했다. 내가 사회에서 만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살아가는 첫번째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회계사로 일하다가 회의가 들어서 서른살에 개발을 배우기 시작했다며, 너도 좋아하는 일에 도전해보라고 말했다. 할 수 있다고. 그 친구 덕분에 다시 내가 무슨 일을 배우고 싶은지, 잘 하고 싶은지를 고민하게 됐다. 

 

사진을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취미로 사진을 찍었고, 여행도 좋아해서 사진을 찍고 여행기를 쓰는 일이 재미있었다. 가끔 외주로 알바도 했고. 그렇게 사진을 정식으로 배우며 일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광고 사진 스튜디오에 지원했다. 당연히 경력이 없어서 떨어졌는데, 3주쯤 지나 갑자기 연락이 왔다. 알고보니 뽑았던 사진과 애가 탈주해서 (비교적) 성실해보이던 다음 지원자였던 내게 연락이 온 거였다. 나름 큰 회사였다. 종합광고대행사에서 직접 운영하는 광고사진/영상 스튜디오였고, 논현에 사옥이 있었다. 광고회사의 대표는 컨설팅펌 출신, 스튜디오 대표는 네임드 사진 작가였다. 원래 스튜디오 인턴(시다)은 최저도 못 받는 게 업계 관행이었지만, 여긴 최저임금이긴 해도 합법적인 월급을 줬다. 

 

문제는 일이 없다는 거였다. 광고 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근데 퇴근은 12시에 해야 했다. 나는 그냥 하릴없이 앉아 있다가, 먼저 퇴근한 실장이 찍은 제품사진 누끼를 땄다. 유명한 사진작가라는 대표는 면접 이후 볼 일이 없었고, 제품 사진 담당이던 실장만 원래 있던 거래처에서 근근이 일을 받아오는 게 다였다. 결국 내 사수였던 실장이 대표에게 일을 못 따올 거면 운영을 하지 말라고 싸우고 나갔고, 결국 일이 없는 날이 계속되자 한 달 만에 나를 광고회사의 마케팅 팀으로 이동시켰다. 그러자 왜 일이 없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새로 영입했다는 팀장은 잡지사 출신 에디터였고, 시니어 중에 광고 경력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종합광고대행사라고 했는데 이전에 다녔던 코딱지만한 바이럴 마케팅 회사보다 거래처가 적은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내 사수로 대리가 새로 왔는데, 대표의 조카였고, 이전엔 영어학원 강사였다고 했다. 그 사람은 나한테 포토샵을 배웠다. 그리고 월급이 내 두 배였다. 월급명세서를 어떻게 관리했길래 내가 볼 수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그것에 대해 물어보니 팀장은 남자고, 기혼이고, 오래 일할 것이니 더 주는 거라고 했다. 딱히 놀랍지도 않았고, 배울 것도 없었고, 시간이 아까워서 바로 그만두었다. 지금 다시 찾아보니 잡플래닛 평점이 무려 1.5점이다. 나중엔 결국 월급도 밀렸다더라. 

 

#4

 

짧게지만 제품 사진에 대해서 좀 배웠기에, 콘텐츠도 만들고 사진도 찍을 수 있다고 적어둔 이력서를 업데이트하자 어느 화장품 브랜드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같이 꼭 일해보고 싶다고 하길래 관심이 있는 분야는 아니었지만 같이 일을 해보기로 했다. 출근 첫 날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고 마케팅을 어떻게 할지 논의하면서, 대표가 앞으로 잘 해보자며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도 사주었다. 그리고는 5일만에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고, 나 이전에 일했던 사람도 동일한 방식으로 해고했다는 걸 알게 됐다. 5일치 급여도 지급하지 않아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동부에 신고도 했다. 

 

이 쯤 되니 운이 나쁜 걸까, 아님 내가 너무 모자라서 그런걸까 고민이 들기도 했지만 깊게 고민하기엔 생활비가 모자랐다. 다시 여기저기에 지원서를 넣었다. 다행히 대기업 계약직이랑, 연봉을 천만원 올려주겠다고 했던 영어학원이랑, 갓 생긴 여행 매거진의 에디터까지, 총 세 군데에 붙었다. 정말 많이 고민했지만, 20대일 때 정말로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일을 한 번만 더 해보자 싶어서 여행 매거진의 에디터로 합류했다. 아주 작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서 내 손으로 하나의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렇게 적응해가던 6개월차, 회사가 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망했다기보다는 대표의 다른 사업 아이템이 큰 투자를 받게 되어서 거기에 집중해야 하니 여행 매거진 사업을 접기로 결정한 거였다. 그렇게 또 퇴사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전 광고 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했던 실장이 근처에서 스튜디오를 차렸다고, 매거진 에디터를 할 때부터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다고 꼬셨던 게 기억이 나서 연락을 했다. 왜, 아무도 보지 않는 매거진에 대표 인터뷰랍시고 돈을 받고 기사를 실어주는 일이었는데, 거기 실을 대표들의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 회사에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서 대표 인터뷰를 따내면(한 번 싣는데 200만원이랬나?) 건당 비용을 챙겨주겠다고 했다. 실장은 그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고, 벤츠를 뽑고,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월세는 내야 하니까 몇 번 사진을 찍었는데, 어느 날 토할 것 같아져서 그만뒀다. 최소한 나는 이런 방식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게 2017년이었던 것 같다. 새로운 일은 잘 구해지지 않았고, 나도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여전히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이대와 신촌 사이 재개발 구역의 반지하 투룸에서 친구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원래는 집이 아니라 스튜디오같은 공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월세를 좀 싸게 내면서 나름대로 살만하게 꾸며놓고 살고 있었는데, 집주인이 월세와 보증금을 올려 받아야겠으니 나가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계약도 끝나지 않았는데 좀 너무했다고 생각은 들지만, 그 땐 잘 몰라서 주인이 나가라면 나가야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졸지에 직장도, 집도 잃은 상태가 됐다. 방을 빼야 하는 날은 며칠 안 남았는데 당장 갈 곳이 없었다. 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았는데, 더 이상 뭘 더 어떻게 노력해야 하지. 엄마가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거나, 고시원이든 어디든 들어가서 서울에 남아있거나,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그런데 정말 둘 다 내키지 않았다. 좀 지쳤던 것 같다. 

 

 

#5

 

우연히 아는 동생에게서 숙식을 제공하는 일자리 구인을 한다며, 좋은 사람이 있으면 추천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제주에 위치한 풀빌라의 마케팅을 담당할 직원을 찾는다고 했는데 이거다 싶었다. 당장 셀프 추천을 통해 면접을 봤다. 디지털 노마드로 일하고 있는 제법 유명한 인플루언서였다. 내가 할 일은 제주의 풀빌라 마케팅을 담당하면서 거기서 다양한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차량도 제공하고, 콘텐츠를 만들면 책으로 낼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솔깃했다. 물론 너무 좋은 조건 같아서 다 지켜지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2주만에 8년간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로 내려갔다. 고등학생 때 그렇게도 살고 싶었던 서울을 떠나는 게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제주에 가면 사진도 찍고 글도 쓰고 내가 원했던 일을 하며 열심히 해야지. 언젠가는 꼭 돈을 모아서 프랑스로 사진을 배우러 유학도 가야지. 다시 희망에 부풀고 기대에 찬 마음으로 제주도로 떠났다.

작품 등록일 : 2025-01-31
최종 수정일 : 2025-01-31

▶ 10년간 10번 퇴사한 이야기, 세번째

▶ 10년간 10번 퇴사한 이야기, 첫번째

흥미로운 사회인의 세계..
El**   
예전 생각도 나고 2편도 재밌게 잘 읽었어!
야옹야옹   
진짜 열심히 살았다
문학필명   
담담하게 잘쓰네
ku키   
옛날 생각 나는 글이다. 서울에서만 여섯 곳 다니고 제주도라니 과감한 선택이라 신기함. 다음 편도 기대할 게~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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