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서는 이렇게 끝났다: "모두에게 죄송합니다."
뭐가 그렇게 미안했던 걸까. 어쨌든 바보 같은 내용이다. 미안하다면 자살을 하면 안 됐다. 녀석의 가족들은 난데없이 막내가 죽어서 황망히 장례를 치르면서, 잠정적인 용의자로 대해지며 경찰 조사를 받을 것이다. 수도에 있는 새 집인데도 싸게 집을 내주고 세입자를 교양있게 대해서 좋다고 고맙다고 하던 집주인에게도 아주 큰 엿을 준 셈이다. 본인이 가장 사랑하고 유서에까지 미안하다고 했던 사람들에게 상처주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까? 죽기 몇시간 전까지 같이 있었던 친구가 받을 충격은? 모르니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이런 이기적인 방법으로 상황을 벗어나려고 했던 거겠지.
병신.
2.
자다가 오른쪽 관자놀이의 극심한 통증에 깨어났다. 안구가 욱신거려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속이 울렁거려 연신 구역질은 해대는데 자기 전에 먹은 것이 없어서 시큼하고 쓴 맛이 올라와 괴로웠다.
'이정도 증상으로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도 되는 걸까?'
핸드폰을 켜서 웹사이트에 수면중 심한 두통 구토를 검색했다. 중간중간 단어를 편두통 구역질 등으로 바꿔가며 검색 결과를 몇개 훑었다. 아픈 와중에도 병원에 가도 되는지 눈치를 보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 이럴 때 위험신호>, <2차성 두통>, <뇌출혈 전조 증상>, <병원에 바로 가야 하는 응급상황 -고열과 구토를 동반한 경우 또는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통증이 훨씬 심한 경우 등은 곧바로 신경과 전문의를 찾아야 한다... >
그동안 어설프게 논문을 찾아 읽고 약물남용 부작용으로 죽을 작정으로 일부러 처방 받은 약을 먹지 않고 모아놓기도 했으면서, 막상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났다.
'고열과 구토는 같이 동반되어야 하는 건가? 고열은 해당 없는 것 같고..'
다시 이런거로 병원에 가도 되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집 근처에 대학병원이 있지만 대학병원 응급실은 너무 비싸고 새벽에도 사람이 많았다. 희미한 불빛에도 머리가 욱신거려서 핸드폰을 끄고 참고 다시 잠들어보려 했으나 이후 40분 동안 통증이 점점 극심해지자 결국 병원에 가기로 했다. 이대로는 아침 늦게까지 잠을 못 들거나 밤을 샐 것 같기도 하고 잠들어도 피곤해서 못 일어날 것 같아 불안했다.
'시험인데 결석하면 사유서라도 필요하니까..'
비틀비틀 일어나 옷을 꿰어입고 원룸 밖으로 나섰다. 다행히 -다행인가?- 밖에 나와 걸어도 통증은 계속 됐다. 길가에 서서 기다리다 걸어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쯤 겨우 한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시립병원으로 가주세요."
3.
차가 움직일 뿐인데도 시야가 어지러웠다. 일부러 신호에 걸리는건가 싶게 천천히 기어가다가 헛구역질이 나와서 해대자 멈춰섰다. 응급실은 골목으로 훨씬 더 들어가야 있는데 야박하게 병원 정문 건너편에서 내려줬다. 무단횡단을 하고 화살표를 따라 비적비적 걸어가는 동안 난 왜 여기 말고 응급실 앞에서 내려달라는 말도 못 하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한심하다.
4.
병원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직원 너덧명이 다가와서 혈압과 체온을 재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안내하는 대로 침대에 누워있다가 CT를 찍고 다시 눕자 손등에 진통제를 놓아주었다. 그제야 살만했다. 학교는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시험 못가더라도 병원에 왔는데 살만해지자 다시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이 들었다. 핸드폰으로 수업 교재를 뒤적이다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잠은 오지 않는데 너무 피곤하다. 도저히 눈을 뜨고 있기 힘들었다. 결과가 나오려면 얼마나 더 걸릴까.
'걱정되는 걸 보니 막상 별일 없겠지.'
시험을 못 보면 너무 귀찮아지는데.. 이대로 밤 새고 가면 백지 밖에 못 낼 것 같다. 어차피 공부량이 너무 적은데다가 아프지 않았어도 일찍 못 일어나고 시험 직전까지 쿨쿨 자다 가서 똑같이 백지 냈겠지만..
"주무세요?"
"아뇨."
대답하며 이불을 내렸다.
"CT를 결과 이상은 없네요. 혈관에도 기형종 같은게 있을 수도 있어서 찍었는데 뭉친게 없어요. 근데 혈당이 140이네요. 자기 전에 뭐 드셨나요?"
"아뇨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뭐 아직 젊고 200은 아니니까 당뇨는 아닐 거에요. 퇴원하셔도 됩니다. 혹시 또 심하게 아프면 신경과 외래 방문하세요."
"네.."
진통제를 다 맞고 갈지, 자고 싶은데 자다갈까. 못일어나서 시험 못 가면 어떡하지. 도망치고 싶다. 아니야 더 이상 스스로에게 핑계거리 불성실을 변명할 면죄부는 주지 말자. 언제까지 이럴거야. 쉬고 싶다.. 좀 더 쉴지 자고갈지 고민하다가 링거를 치우는 손길에 집에 가기로 했다. 잠자기는 글렀다.
5.
시험이 전부 끝나고 나서야 그제야 숨통이 트여 생각해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인가? 3년 전에도 그랬는데 여전히 감정에 매몰되자 다시 또 죽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다. 교수님은 강의하고 연구하는 사람이지 학생의 정신건강을 담당하는 사람이 아닌데. 정말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면 아플 때는 힘들다고 교수한테 메일 보낼 게 아니라 병원이나 상담센터 같은 전문 기관을 찾아가야 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아주 어린 시절부터 죽고 싶다고 생각해왔고 오랜 기간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막상 왜 그런지 근본적인 이유는 모르겠다. 가정폭력도 없고 학교폭력이나 따돌림을 당하지도 않았고 범죄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신체장애도 없고 학습장애도 없고 고등교육도 받고 있다. 이정도면 오히려 좋은 환경에 속하지 않나? 매일 꾸준히 운동도 하고 있다. 유전적으로 우울증에 취약한 걸까. 가족력은 없는데.. 아니야 유전적인 영향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무엇이 자꾸 나를 자극하는 걸까.
모르겠다. 이유를 알면 원인을 제거하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을텐데. 답답하다.
6.
해야할게 많은데 모처럼 황금 같은 휴강을 며칠 내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려보냈다. 주말까지 허투로 쓸까봐 한번 틀면 시끄러워서 집안에 쳐박혀있기 싫어지도록 하는 세탁기를 돌리고 무작정 밖에 나왔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
발길 닿는대로 걷다보니 건너편에 영화관이 보여서 들어갔다. 상영중인 목록을 보다 대충 골라서 검색하니 이름만 알던 철지난 히어로 영화의 빌런이, 일반인에서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내용이라고 했다. 현실적이고 암울해서 보고나면 진빠지고 우울하다는 평을 봤는데 막상 보고나니 의외로 괜찮았다. 주인공은 불행한 어머니 밑에서 항상 웃기를 강요당하며 감정을 억압당하고 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피해망상으로 가득한 정신병자여서 전혀 공감되지도 동정심이 들지도, 따라서 감정적으로 지치거나 피곤하지도 않았다. 습관처럼 신분증을 놓고 나와도 볼수 있는 15세 관람가 영화였기에 중간에 갑자기 총질을 해대서 몇번 깜짝 놀랐을 뿐,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혹은 저런 정신병자하고 얽힐 일 없게 조심해야지 하는 감상만 들었다. 정신병자와 얽힐 일 없게... 남들도 나를 보면 이렇게 생각할까.
각자 인생 살기 바빠서 아무도 남에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생각을 없애는게 쉽지 않다.
7.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며칠 동안 만약 당뇨일 경우를 대비해서 혈당측정기를 알아보고 혈당관리 생활습관 관리하는 법 등에 대해 조사했었다. 다행히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지만 당뇨 수첩과 같은 원리로 우울증도 매일 상태를 기록하고 관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도면 정신과적으로 만성적인 악성 종양이 있는거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8.
이번 면담에서도 끝내 인생 내내 들었던 자살충동과 자살 시도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가족에게 연락이 가면 분명히 옆에 끼고 있으려고 할텐데 누군가와 함께 사는건 정말 싫다... 지나치게 숫기없고 낯을 가리는 대인기피적인 성격은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을 대할 때도 자주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
물론 그 때문만은 아니고 병적인 상태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겠어서, 라는 이유도 있다. 증상을 의사에게 충분히 잘 전달할만큼 본인 안에서조차도 정리되지 않아서 말로는 더 표현하기 어려웠다. 증상에 먹혔을 때 감정에 매몰된 자신은 상태가 좋을 때는 스스로도 어딘가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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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행잉 케이스 (The Hanging Case)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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