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덫

<쥐덫>

 

 

제1막 

 

태섭과의 섹스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평소의 폭력적인 성격이 아무렇게나 펼쳐놓은 이불 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다혜의 몸은 마치 도마 위 벌겨벗겨진 채 올려진 생닭이 된 느낌이었다. 닭을 난도질하는 투박한 칼이 태섭의 성기였다. 닭의 하얀 배를 가르고 지저분한 칼날이 무자비하게 피부를 뚫는다. 닭은 이미 죽은지 오래 되었기에 조용하다.

 

 

여느날과 같이 일방적인 섹스가 끝나고 태섭은 일어나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다혜는 그대로 다리를 벌린 채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공허한 눈으로 태섭이 들어간 유리문 안을 바라본다. 가득 찬 습기 때문에 담배 연기조차 금방 흐릿해져서 곧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의 나날도 뻔한 하루하루의 반복이다. 그 어떤 자극도 없는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건 태섭도 마찬가지이다. 둘같은 종류의 인간들은 원래 그렇다. 무덤덤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태섭이 불법적인 일을 그만두고 강북에 있는 이 작은 목욕탕을 운영하게 되었을 때 다혜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젊은 나이에 6천만원이라는 빚더미를 안고 믿을 거라고는 잘생긴 외모 뿐이었던 남자. 원래 이 바닥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다혜가 그를 떠날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던 다혜가 몇년도 안 지나 쉼터로 선택한 것은 또다시 태섭의 곁이었다. 그렇게 여러번 차단했던 그의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던 건 과연 좋은 생각이었을까.

 

 

 

"다혜야, 오빠 이제 정신 차렸다. 다시는 불법 같은 거 안해."
"그러시겠지."

 

 

 

콧방귀를 꼈으나 얘기를 차근차근 들어보니 이번에는 희망을 품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을 거라고, 태섭같은 망나니가 변한다면 다혜도 옆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섭은 하루에 한번씩 목욕탕을 청소했다. 새벽 4시에 그의 핸드폰 알람이 불썽사납게 울리면 다혜는 그를 깨웠다. 그러면 그는 꼭 매일 정해진 일정인 것 마냥 일어나자마자 허겁지겁 다혜의 몸을 탐했다. 그리고 짧은 섹스가 끝나면 담배를 꼬나물고 목욕탕 청소를 하러 들어갔다.

 

 

 

목욕탕은 놀라울 정도로 손님이 없었다. 장사치들이 말하는 초심자의 운 따위도 적용되지 않은 것이다. 개업한 날부터 꾸준히 손님이 없었다. 노후된 건물에서 나는 곰팡이 냄새를 며칠동안 힘들게 없앴지만 아무런 보람이 없었다.

 

 

 

그래도 태섭과 함께 열심히 청소를 할 때는 조금이나마 행복했던 것 같다. 지금은 다시 그를 떠날 생각을 하고있다. 이번에 떠나면 이제 돌아오지 말아야지. 다혜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악세사리 가게를 운영하는 망상을 하며 태섭과의 섹스로 뒤집어진 속을 달래고는 했다.

 

 

태섭과 다혜가 만난 건 3년 전 일이다. 그의 첫인상은 꽃미남이었다. 태섭은 항상 덜떨어진 여자들과 함께 일했는데 다혜같이 조금은 똑똑하고, 시궁창 세계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여자를 만난 걸 행운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돈냄새를 맡고 사람이 망가지는데는 한달이면 충분했다. 그러다보니 신선한 뉴페이스였던 다혜도 다른 여자들과 비슷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꾀도 많아서 자주 일을 내팽개치는 그녀가 더이상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겉보기에는 태섭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깔보고 있다는 걸 그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얼굴이 좀 반반하다고 해서 다른 여자들과 차별을 둔 적도 없었는데 건방지고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을 내서 가평에 펜션을 잡고 놀러간 어느날. 다혜는 새벽에 택시를 잡아타고 어딘가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연락두절. 뻔할 뻔자였다. 그후로 태섭은 "도우미년들이 다 그렇지 뭐."라는 말을 항상 덧붙이며 다혜의 욕을 하고 다니고는 했다. 하지만 자위를 할 때마다 다혜와의 섹스가 떠올랐다. 씩씩거리면서 그녀만의 살짝 올라간 눈매와 작은 엉덩이를 상상했다.

 

 

 

그동안 죽도록 노가다를 하고 평생 못갚을 거 같았던 빚도 거의 다 갚았다. 이 목욕탕을 인수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좋은 타이밍에 다혜와 연락이 다시 닿은 것이다. 아는 형이 헐값에 성인오락실을 넘겨주겠다고 했지만 충동적으로 여기를 선택했다. 가평에서 야반도주하기 전 날, 다혜가 고기를 뺏어먹으면서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한심하게 살거야?"

 

 

-

목욕탕 안으로 다혜가 따라들어와서 끈적이는 태섭의 등에 키스를 했다.

"오빠 지금 바쁜 거 몰라?"

태섭의 거친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그녀는 연신 키스를 퍼부었다. 자연스레 두 남녀의 몸이 다시 뒤엉켰지만 얼마 못가 풀렸다. 물을 새로 받은 냉탕 안에 뛰어들어서 끈적해진 몸을 씻어내고 있는데 다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놀러가자. 나 가평 가고싶어. 그때 우리 재밌었잖아."
"미친년. 재미같은 소리 하고있네."

 

 


"손님도 없는데 뭐. 하루만 놀다오자. 이틀은 더 좋고."

다혜는 태섭을 떠날 생각인거다. 3년 전과 똑같이. 이번에는 태섭도 알고있다. 뭐, 될 대로 되라지. 둘은 렌트카를 빌려서 그날 저녁에 가평으로 떠났다.

 

 

 

손님이 없는 텅 빈 목욕탕에서 출발했지만 주말 밤 도로의 사정은 달랐다. 만차인 주차장에 있는 거마냥 차가 막히기 시작했고 다혜는 옆에 앉아서 짜증을 내는 것이다.

"오빠, 언제 도착해? 가평이 이렇게 멀었어?"

태섭은 대답 대신 음악소리를 크게 키웠다.

 

 

 

"나 화장실 가고싶단 말이야. 지금 급한데 어쩔거야?"
"야, 닥치고 조용히 좀 못있냐?"
"어휴, 목소리 큰거 봐. 성질 좀 죽여. 오빠도 내년이면 서른이야. 나이 좀만 더 먹어봐. 그땐 옆에 여자도 없다? 있을 때 잘하라구."

 

 

 

다혜가 정곡을 찌른 걸까. 태섭은 별안간 소리를 질러댔다.

"개시발! 이 좆같은 년아. 너 가평 가서 튈 생각인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나 이번엔 그 정도로 호구 아니야."
"왜 이렇게 피해의식에 쩔어있어? 오빠 되게 어이없다."

태섭은 한숨을 길게 쉰 후 다혜의 뺨을 여러번 손으로 갈겼다. 때린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비명소리 한 번 내지않고 눈물이 고인 눈으로 태섭을 노려보기만 하는 다혜가 더 밉살스럽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한대를 더 때렸을 때 그녀의 귀걸이가 끊어지면서 찢어진 귓볼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 미친새끼야. 너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자신의 몸보다 비싼 귀걸이 걱정을 하는 게 다혜답다. 귀걸이는 창 밖으로 날라간 모양이다. 뒷좌석에도 바닥에도 보이지 않는다. 휴게소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왜 굳이 맞을 짓을 하는 건지. 그래도 조금 미안해진 태섭은 다혜를 달래주기로 했다.

 

 

 

"다혜야, 휴게소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참자."

서럽게 훌쩍이던 다혜가 차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쫓아가야되나 말아야되나 태섭은 잠시 고민하다가 정에 못이겨 결국 차에서 내려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휴게소 쪽으로 뛰어갈 줄 알았던 다혜는 길치답게 길을 못찾는 모양이다. 넘어질 듯 말듯 위태롭게 뛰는 다혜의 불안한 발걸음이 향한 곳은 또다른 도로 위다. 

 

 

가평 근처라 그런지 펜션인지 별장인지 모를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는 게 보였다. 한참을 더 뛰어가다 드디어 다혜가 멈춰섰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태섭이 말했다.

"너 나 운동 시키냐? 너가 뛰어봤자지.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그냥 조용히 좀 가자."

다혜는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 눈 앞에 보이는 건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오빠, 우리 예약도 안 했잖아. 그냥 들어가서 잘 수 있는지 물어보는게 더 빠르겠다. 폰 가져왔어?"

 

 

 

 

태섭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12시가 넘어서 날짜가 바뀐 게 보인다.

"지랄... 돈 아깝게. 그냥 어플 켜서 모텔이나 잡아."
"여기까지 왔는데 펜션으로 가야지. 나 진짜 오빠랑 펜션 가고 싶어서 여기 오자고 한 거야. 튈 생각 없었단 말이야. 내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억울해. 엄청."

 

 

 

다혜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괜히 뻘쭘해진 태섭은 핸드폰으로 다시 눈을 돌린다. 그런데 핸드폰 액정에도 어느새 물이 떨어지고 있다?

"야, 좆됐어. 비 오잖아."

태섭은 다혜의 어깨를 감싸안고 꽃으로 장식된 아치를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불은 켜져있는데 아무도 나와보지 않는 걸 보니 사람이 몇명 없는 거 같다. 아니면 주인이 다른 건물에 있던지. 문은 당연하게도 잠겨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펜션이랑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읽을 수는 없지만 한자로 된 문패가 붙어있고 문 근처에 깨진 화분이 보인다.
난은 아닌 거 같고 커다란 잎사귀를 가진 딱딱한 식물인데 힘없이 쓰러져있다. 누군가가 정성들여 키우던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방치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묘한 느낌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관에서 삑-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중년 남성의 낮은 톤의 목소리.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다. 이 집의 주인은 점잖은 사람인 거 같다. 뜻밖의 상황이었는지 다혜는 벙쪄서 얼어붙어있다가 태섭의 팔을 잡아당긴다.

"오빠, 여기 누가 사는 데 같아. 펜션 아니잖아. 그냥 다른 데 가자."
"물어보면 되지."
"그냥 가자고!"

 

 

 

 

태섭은 깐죽거리는 말투로 집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아저씨. 우리가 놀러왔는데 숙소 예약을 못했거든요. 여기 펜션 아닌 건 아는데. 잠깐 와이파이만 쓰고 갈게요?"

다혜가 급하게 쏘아붙인다.

"와이파이가 문제야? 화장실, 화장실 물어봐!"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저 말고 여자친구가 급하다고 해서요."

남자는 대답이 없다. 태섭은 욕지거리를 하며 다혜의 어깨를 잡아 끌고 뒤돌아서려 했다.

"시발, 있는 놈들이 이렇게 인정이 없어요. 야, 집 근처니까 와이파이 되나 일단 켜봐."
"오빠, 근데 나 이제 오빠 여자친구야?"

웬일인지 이렇게 묻는 다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평소의 다혜와는 다르게 진지해보인다. 태섭은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어져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떤 말로 골려줄까 생각하던 차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태섭도 놀랐다.

 

 

 

문만 열린 게 아니라 사람이 같이 나왔기 때문이다.  집주인 남자다. 그런데 그는 우리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눈을 감고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이상하다. 어깨에 닿을만큼 길지만 잘 손질된 머리카락, 나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깊게 패인 주름, 어두운 색의 니트, 목에 두른 스카프.. 그리고 손에는 보행용 지팡이가.

 

 

 

그제서야 태섭은 남자가 맹인인 걸 알았다. 다혜도 지팡이와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걸 보니 눈치를 챈 것 같다.. 다혜 녀석도 나랑 같은 생각 하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잘 어울리는 커플이 될지도 모르겠네.

"아저씨, 저희가 지금 좀 곤란한 상황이에요. 그냥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시간이 이런데 미성년자라 받아주는 데도 없어요."

 

 

 

그 순간 다혜는 태섭의 생각을 읽은 것 같다. 하지만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니 동조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태섭은 생각했다. '그래, 역시 다혜는 나랑 다르지..'.

"사람이.. 두명인가?"

눈치가 빠른 남자의 물음에 다혜는 소름이 끼쳤다.

"오빠, 뭐하는 거야.. 그냥 가자.. 제발.. "

아랑곳하지않고 태섭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지금 우리 다 젖었어요. 아저씨, 너무 추워요. 잘 안 보이시겠지만... 아, 죄송합니다. 얘도 다 젖었어요. 저는 괜찮은데 얘는 몸이 약하거든요. 괜히 저랑 같이 나오자고 해서.. 고생만 시키는 거 같아요."
"오빠!.."

그새 주름이 더 깊어진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미심쩍어한다.

 

 

 

"자네들 가출한거야?"
"부끄럽지만. 맞아요."

".. 화장실만 쓰고 얼른 나가게."

구차한 거짓말로 동정표를 얻는데 성공했다. 

태섭은 다혜의 등을 먼저 떠밀었다. 다혜야, 도와줘. 제발. 나 이제 빚이 800밖에 안 남았다. 이 장애인 노인네 한번 벗겨먹으면 내 빚이고 목욕탕 대출금이고 다 해결이야.

"아저씨, 정말 죄송해요.. 빨리 나갈게요."

떨리는 목소리로 다혜가 말했다. 멍청하긴. 넌 역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구나!

 

 

 

다혜가 앞장서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남자가 소리쳤다.

"신발은 벗고 들어가라고! 바로 앞에 실내화가 있어. 잠깐이라도 내 집을 더럽히지 마."

당황한 다혜는 뒷걸음질하더니 낮은 찬장 위에 있던 실내화를 꺼내 신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란 나머지 안쪽에 있던 실내화 한짝을 떨어트렸다. 그걸 보고 "아!"하고 탄식소리를 내더니 허둥지둥 실내화를 다시 제대로 신고는 화장실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

 

 

제2막

(태섭의 독백)

이 불친절한 맹인 노인네가 문학상까지 수상한 작가라는 사실은 집으로 들어온 그날 알 수 있었다. 벽 여기저기에 걸려있는 수상패, 노인의 사진이 실린 신문 기사. 고급스러운 액자에 떡하니 장식되어 있었다.

 

 

박용화. 꽤 특이하고 멋있는 이름같이 들리지만 자살한 한류스타와 이름이 비슷하다. 하여튼 이 노인네, 재수가 없다니까.

이만큼 명성이 있으면 뭐하나. 우리가 이 집에 들어온지 벌써 일주일 짼데 찾아오는 사람은 커녕 개미새끼 한마리 얼씬거리지 않으니. 딱하기 그지없다. 

 


나같은 놈한테 걸려들었으니 확실히 재수가 없는 노인네가 맞다. 내가 만약 전과자로 콩밥을 처먹은 적이 있다면 혐의가 분명 사기였을테니.
별것도 아닌 년한테 홀린 호구들이나 의지할 데 없는 초라한 몸팔이 기집애들 등처먹는 게 내가 머리털 나고 제일 오래 한 일이다. 이 미친 노인네, 눈도 안 보이는 주제에 얼마나 밝히는지. 덕분에 생각보다 일이 더 쉬워질 거 같다.  

 


벌써 다혜랑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하긴, 첫 날부터 그랬었지. 다혜의 과거를 팔아먹길 잘한 거 같다.

 

 

(다혜의 독백)

벌써 일주일이다, 일주일. 언제까지 이 불쌍한 노인을 속여야 할까. 나쁜 짓을 안 하고 산 건 아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태섭이 새끼랑 붙어먹다보니 나까지 저질이 되어간다.

여기에 온 첫날, 나는 정말 아찔했다. 화장실에서 태섭이 새끼가 하는 말을 다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왜 가출한거냐고, 하필 왜 여기로 왔냐고 그 사람이 그런 얘길 물어본 거겠지. 그런데 대답을 해도 그 따위로 할 게 뭐람?

 

 

"저는 흔한 얘기에요.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사연이라고 할 것도 못 될걸요. 아빠가 술만 마시면 엄마랑 저랑 두들겨 패니까 나올 수 밖에요. 저도 다 컸으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다혜는요. 진짜 불쌍한 애에요...

다혜는 아마 평생 제대로 된 생각 못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들어보면, 미칠만도 해요. 쟤네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친척집에 얹혀 살았는데요. 사촌들한테 강간당했대요. 그것도 13살 때부터 수도 없이요. 그런데 누굴 믿을 수 있겠어요. 남자라면 치가 떨리겠죠. 저랑 사귀게 된 것도 진짜 기적같은 일이에요." 

 

 

벌레 가족. 그래, 어릴 때 우리집에는 벌레가 몇마리나 살고 있었지. 나도 그중 하나인 밥벌레였고.
잊고 살고 싶었는데 내가 병신이지. 태섭이 새끼한테 말해놓고. 이런 누구나 질색할만한 과거를 들어도 남자들은 쉽게 동정하면서 다가오기 마련이지. 어떻게 보면 이 남자도 똑같을지 모른다. 처음엔 동정하지만 나중에는 나를 쉽게 보고 어떻게든 침대로 데려가려고 하겠지. 이런 생각까지 가니까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익숙한 감각이 또 느껴진다. 그만 생각하자.

 

 

(독백 끝)

 

 

날짜가 지나갈수록 태섭은 일이 잘 풀려가고 있다고 느꼈지만 다혜는 불안했다. 왜 노인은 우리를 쫓아내지 않는거지? 언제 집에 돌아갈거냐고 물어보지도 않는다. 언제까지 우리를 여기에 머물게 할 작정인걸까.

 

 

노인의 하루는 담백했다. LP판으로 항상 듣는 음악을 들으며 티타임을 갖거나, 소파에 앉아 라디오를 듣다가 잠을 자거나, 화초를 조심스레 만져보며 닦거나.

다혜가 한가지 안심할 수 있는 건 시선에서 자유롭다는 거였다. 노인은 다른 남자들과 달리 다혜를 훑어보거나 힐끔힐끔 몰래 쳐다보거나 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저씨, 그게 무슨 음악이에요?"

가급적 말을 아끼라고 태섭이 신신당부 했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한 다혜는 노인에게 또 질문을 던졌다. 자신을 쳐다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남자. 힘이 없고 장애까지 가진 외로운 노인. 그 점이 이상하게 경계를 풀게 해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대답이 없는 노인. 다혜는 심심했다. 핸드폰을 들여다봐도 새로울만한 건 하나도 없고 일상은 여기서도 단조롭기만 했다. 그날 역시 똑같이 보내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노인이 먼저 말을 건냈다.

"눈치 볼 필요 없다."
"네?"
"일부러 나한테 말 걸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 가고싶을 때 집에 들어가렴. 그런데 네 남자친구는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거지? 가평 사는 친구라도 있는 거니?"

 

 

'아저씨 인감을 들고 은행에 갔어요.'라고 사실대로 대답해줄 수는 없었다.

"아.. 아저씨한테 죄송한가 봐요. 오빠가 표현은 좀 그렇지만 생각은 그렇지 않거든요. 원래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일자리 알아보러 다닌대요."

노인이 웃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게 너희 나이에는 굉장히 힘든 일이지."
"아니, 아저씨한테 정말로 죄송해서..."

 

 


"괜찮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참을 수가 없는 건 다혜 쪽이었다.

"저 아저씨가 옛날에 쓴 책이요. 읽어봤어요."
"그랬니?"

 


"네, 책꽂이에 몇권이나 있더라구요. 궁금해서요."

자그마한 찻잔에 담긴 커피인지 차인지 모를 것을 노인이 한 모금 마셨다.

"꽤 인상깊었어요. 역시 상을 아무한테나 주는 게 아닌가봐요."
"원래 책을 좋아하니?"
"어릴 때 좋아했던 적이 있었어요."

 

 

마음 속으로 아차!하고 다혜는 다음 말로 수습하려 했다.

"물론 지금보다 더 어릴 때요..."

"어떤 장면이 그렇게 인상 깊었는지 궁금하구나."

"여주인공 집이 불에 타는 장면이요. 너무 슬펐어요.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거든요. 집에 불이 난 건 아니었지만.."

 

 

또 말실수를 한 거 같다. 어떻게 다음 말을 이어가야 하지? '저도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적이 있거든요.'라고? 아냐, 쓸데없이 감상적이야. 그런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하루 아침에 가족을 전부 잃었거든요.' 아냐,아냐. 굳이 다시 떠올리게 될 뿐이야. 

 


다혜는 불필요한 말들을 떠올리느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내가 왜 이러지?

"별로 좋은 내용의 책은 아니지. 내가 썼지만 좋아하지 않는단다."
"아뇨, 내용이 이상한 건 아니었어요. 마지막은 해피엔딩이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글을 안 쓰세요?"

 

 

혹시 실례가 되는 말을 한 건 아닐지 오늘따라 소심해진 다혜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인이 의외로 흔쾌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지금 한번 써볼까?"
"네? 어떻게.."

또 실례의 말을! 다혜는 자책했다.

 

 

"저기 저 큰 서랍장 안에 타자기가 있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재밌었으면 좋겠구나."

당황스러웠지만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한 다혜가 서랍을 열었다. 정말 타자기가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골동품으로 보였고 꽤 값이 나갈 것 같았다.

"이 집엔 오래된 물건들이 많네요."

 

 

생긴 건 키보드랑 달랐지만 타자를 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 같았다. 서랍 안에는 깨끗한 종이들이 겹겹히 쌓여있었기 때문에 다혜는 종이를 몇장 꺼내서 바로 타자기 안에 집어넣고 사용법을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불러주는대로 그대로 옮겨 적으면 된다."
"네. 준비 됐어요!"

긴장된 손가락을 움직이려 하는 순간, 거실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야, 너 뭐 하고 있어?"

태섭이 은행에서 돌아온 것이다. 표정을 보니 이번에도 성과는 미미한 모양이다.

"할 얘기 있으니까 이리와 봐."

 

 

또 강압적인 말투. 다혜는 순간 짜증이 치솟았지만 순순히 그의 말대로 움직였다. 2층으로 서둘러 올라가면서 혼자 남겨진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찻잔을 입에 대고 있다.

 

 

"인감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너, 뭐 알아낸 거 없냐?"
"뭘 알아내라는 거야?"
"카드 비밀번호라던가. 저 노인네 구슬리기가 어려우면 틈날 때마다 집안 구석구석 다 뒤져봐. 나처럼. 하루종일 여기 처박혀서 뭐하는 거야?"
"어떻게 그래?"

 

 

이렇게 쏘아붙이며 다혜는 자기도 모르게 태섭을 환멸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야, 너 눈을 왜 그렇게 떠? 요즘 왜 그래? 예민하면 잠이나 자. 괜히 나한테 화풀이 하지 말고."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저 새끼랑 노는데 내가 방해해서 기분 나빠?"
"목소리 좀 낮춰!"
"너한테 잘해주니까 마음이 약해지지? 저 새끼는 뭐 다를 거 같애?"
"유치하게 지금 뭐하는 거야. 설마 질투해? 너야말로 나 그만 이용해먹어. 너가 제일 나쁜 새끼야!"

 

 

다혜는 거실로 다시 돌아가려 했다. 곧바로 머리채를 붙잡히기 전까진.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내며 다혜가 울부짖었다.

"아저씨, 아저씨!"
"야, 너 전부 다 말하려고? 저 새끼한테? 내가 직접 말해줄까? 며칠 전까지 넌 돈밖에 모르는 갈보년이고.."

 

 

"그딴 식으로 말하지마, 이 씨발 새끼야-"
"다혜야~ 다혜야! 정신 차려! 나만 나쁜 놈 같애?"

 

 

그때 이 집에 온지 처음으로 초인종이 울렸고 그들은 사색이 되었다. 누군가의 방문이었다. 전혀 달갑지 않은 방문. 서로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고있는데 노인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문을 열어주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는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서있었다. 옆으로 넘긴 앞머리와 고상해보이는 옷차림이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아버님.. 요즘 정말 이상하세요. 왜 아무 연락도 없으시고 모임에도 안 나오세요?"
"네가 여기 웬일이냐."
"제가 못올 데 온 건 아니잖아요, 올해 되고 많이 못 찾아뵙긴 했어요. 서운하셨죠? 제가 부족해서 그래요."

 

 

2층에서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데 노인이 갑자기 다혜를 불렀다.

"다혜야- 이리 내려와봐라."

다혜는 다시 태섭과 다시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눈빛교환을 한 뒤 태섭이 고개를 끄덕이자 계단을 내려갔다. 여자는 조금 당황한 거 같았지만 그렇게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이 아가씨는 누구..?"
"사회복지사야. 너희들이 하도 두문불출하니까 안심할 수가 있어야지.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힘들다."
"아버님, 무슨 그런 말씀을.."

 


"유언장 받아적어 줄 사람은 있어야지. 너희가 보낸 그놈은 내 마음에 안 들었어. 다혜가 해줄거야."

노인이 여기까지 말하고나니 여자는 예민해진 감정과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버님, 중요한 사안인데 이렇게 멋대로 결정하시면 곤란해요."

"멋대로?"

노인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여자는 오늘은 그만 물러설 때라고 생각한 거 같았다.

 

 

"오늘 양선생님 생신이신 것도 까먹으셨죠? 두분이 자주 다투셔도 그래도 유일한 친구분이잖아요. 연락이 안 되신다고 걱정하셨어요."


"이제 그만 죽었다고 하지 그러냐."


"아버님, 또 그런 말씀을.. 양선생님 들으시면 서운하실 거에요. 우리 그이도 그렇구요. 오늘 저녁에 파티에는 꼭 오셨으면 좋겠어요."

 

 

노인이 깊게 한숨을 내쉬자 여자는 눈치를 보더니 인사를 꾸벅 하고 드디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이따가 꼭 뵈요."

다시 문이 굳게 닫혔다. 다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저씨, 아저씨, 죄송해요.."

 

 

떨리는 손으로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다혜는 어쩔 줄 몰라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왜 거짓말 하셨어요?.."

"오늘 저녁은 바쁠 거 같구나. 파티에 입고갈만한 옷이 없겠지. 다 큰 아가씨가 가출 청소년 노릇을 하느라."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지금 나가면 늦더라도 갈 수 있다. 옷은 사고 가야지."

2층에서 태섭이 내려왔다. 태섭은 다혜를 바라보며 잠시 멈칫하더니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녀가 같이 가지 않을 걸 아는 듯이.



 





















 

작품 등록일 : 2020-06-12

▶ 용주골

언니 재밌다!!!!!
가마니   
이 언니 글 진짜 잘쓴다
wi******   
재밌다. 엠생과 장애인. 근데 제목이 쥐덫이네.
사실.. 다혜같이 몸만 큰 여자는 소설이라도 보기 싫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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