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보기 힘들다는 아중선배를 자주 마주쳤다.
자연스레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수업도 듣게 되니
아중선배는 흉흉한 소문과 다르게 평범한 선배(?)였다.
조금 상스럽게 하고 싶은 말 다 하지만 불필요한 말은 안 했고 선배답게 밥도 종종 사줬으며 가장 놀라운 점은 단편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모두들 아중 선배는 영화 연출보다 연기를 할 거라고 말했다. 그녀가 다수의 촬영에서 스탭으로 참여한 적은 거의 없었지만 연기를 한 적은 몇 번 있었기 때문에
영락없는 연기자 성향이라고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다.
나도 짐짓 배우가 되려고 하나 생각했었던 터라 영화를 찍겠다는 말이 새삼 충격이었다.
" 난 감독이 될 건데? "
" 사람들이 알면 놀라 자빠지겠는데요 "
" 에이 시발 것들이 영화가 무슨 자기들처럼 찌질이 새끼들이나 하는 줄 알아? "
찌질한 애들이나 하는 게 영화 아닌가.
라고 어쩐지 반문하지 못하고
도대체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쓰는지 궁금했다.
" 다 쓰고 보여줄게. 첫 피드백은 네가 꼭 해줘 "
" ...쓰고 있는 거 맞아요?? "
수만 명의 영화학도들은 모두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졸작이든 워크숍이든, 모두들 응당 자신의 단편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못 했다. 누군가는 상업영화든 독립영화든 진짜 실전이라는 곳에 투입돼서 무용담을 늘어놓지만 영화감독이 되겠다면 결국 손에 쥐어야 하는 건 자신의 단편 영화였을 뿐.
대다수의 감독들이 스스로 시나리오를 쓰지 않으면 안되는 전염병에 걸린것은 이미 뿌리깊게 단편영화 시절부터 감염된 것이다.
아무리 쥐 콩만한 규모라도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제작하는 일은 뼈를 깎는 고통이다. 늘 생각보다 예산이 늘어났으며 10분 내외로 하기로 해 놓고 결국에는 30분 넘는
영상을 토해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 전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왜 워크숍을 시나리오 몇 개 뽑아서 만들어야 하는 건데요?? "
나는 시나리오 경쟁을 해서 뽑힌 작품만 영화로 만드는 시스템에 굉장히 불만을 품고있었다.
" 전 제 작품 찍으려고 왔다고요."
" 나도 그래~ 나도 찍을 거야~ "
" 아 진짜 선배!! 장난 아니고,이럴라고 등록금 내고 들어온 게 아니라고요! "
" 그래! 오예야 당장 가서 학교 때려치운다 하고 등록금 받아와라. 그걸로 영화 찍어! "
이윽고 아중선배가 나지막이 말했다.
돈이 문제니까. 그 많은 학생들 다 찍는 게 비효율적이니까.
스스로한테는 세상에 내놓으면 대중의 심장을 파고들 대단한 이야기지만 사실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가 대부분이라고.
" 오예야. 안 뽑혀서 못 찍는다고 벌써부터 불안해서 지랄 떨지 말고 그냥 네 거 찍으면 돼."
" ... 어떻게 혼자 찍으란 말이에요. 제가 쓰는 건 그런 게 아니라고요!"
" 벌써부터 무슨 대작을 만드시려고 이 염병을 떠실까.. A선배 좀 봐라!"
소문에 의하면 아중선배한테 가루가 되도록 차인 남자,
A선배.
백 번 찍으면 나무는 넘어간다지만, 아중선배는 탄력성 좋은 고무 타이어였을까.
그녀에게 그토록 순애보를 가지고 들이대다가 안되니까 머리카락을 밀어버리고 갈색 비니를 쓰고 다녔다는데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 난다. 그런 A선배의 이름을 거론하다니.
A선배는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그때그때 사람들을 불러 영화를 찍었다.
각본 연출 주연 등등 혼자서 모든 걸 소화하며 독립 장편을 찍다 보니 나름 따르는 남자 후배들이 생기고 그를 도왔다. 집요하게 사람을 부려먹어서 결국엔 다 나가떨어졌지만.
아중선배가 턱을 괴고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 A선배가 하루라도 도와줄 스텝 구한다고 하는데. 네가 한다고 이야기할까? "
" 네?? 제가요?? "
믿기지 않게도 아중선배는 A선배를 종종 도와줬다고 한다.
아중선배는 분명 A선배의 행보에 흥미를 느낀 거 같다
그는 현장 사운드도 포기하고 후시녹음을 하기도 했을 정도로 보기 드문 괴짜였다.
모두들 막상 자신의 시나리오를 쓰고 나면 상업영화의 축소판처럼 걸출하게 찍어내길 원했기 때문에 A선배의 영화 찍는 방식을 안타까워하며 소소하게 응원해주는 분위기였다.
그는 1년 넘게 찍고 있었다.
돈이 없으면 중단하고 돈 생기면 다시 찍고.
나야말로 A선배처럼은 절대 영화를 찍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도대체 어떻게 찍고 있는지 궁금하긴 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중선배는 오지 않았다.
씨발.
그녀가 야하게 눈웃음치며 말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하겠다고 해가지고.
A선배와 단둘이 한강공원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는 키가 165인 나보다 작고 게다가 피부가 하얗고 팔목이 가늘었다. 금수강산이 수백 번을 변해도 얼빠인 나는 비리비리한 남자랑 같이 있는 게 창피하고 진심으로 같이 다니기 싫어서 당장 집에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 아중선배.. 안 오려나봐요. "
" 안 오려나..? 이따 오지 않을까?? 꼭 와야 하는데.. 전화해볼래?"
지가 전화해볼 것이지 내 앞에서 한숨을 푹푹 쉬는 거다.
내 기분이 더 좇같구만, 그의 머리 위에 얹은 보풀 가득한 비니를 걷어차고 싶었다.
답답한 심장을 부여잡고 내가 촬영을 하기로 하고.
" 뭘 찍을 거예요?? "
" 그게.."
도대체 A선배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자기 머릿속에 이미 다 구상되어 있다고 하는데,
내가 인상 팍 쓰고 서 있자 안되겠는지 종이에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애당초 완성된 시나리오가 없었다.
" 홍상수가 와서 선배한테 한수 배워야겠는데요? "
" 에이.. 무슨."
A선배는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종이에 적힌 내용도 사실상 무용지물이었고, A선배가 그때그때 말하는 대로 카메라를 잡았다.
도대체 뭐 하는지 궁금해서 왔더니만 A선배의 원맨쇼를 보면서 도무지 무얼 하는지 몰라서 짜증이 치밀었다.
카메라 앞에서 진지하게 연기하며 휘젓고 다니는 A선배의 모습이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그 혼자만 무엇을 찍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점이 묘하게 더 짜증을 유발했다.
" 무슨 내용입니까? "
" .. 한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지.. "
" 진부하네요. "
" 그렇지.. 하하 근데 다른게 생각이 안 나."
리얼리즘.
영화에 현실을 담아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다. 적어도 영화 찍는 학생들에게는.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 자기 이야기를 쓰고 찍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 출발이 나쁘지 않았지만 대부분 재미없었기 때문에 나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지배했다.
" 아중이는 안 오려나? "
" 안 올걸요."
" 상대 배우 해주기로 했는데.. 사실.. 고백하려고.. 도와줄래? "
" 네??.. 이미.. 차인 거 아니었어요?? "
" 아이씨! 제대로 고백한 적 없어! "
그러니까,
A선배는 그동안 차였다고 전혀 생각 못 하는 거고
오늘은 각 잡고 고백하시겠다는 거다.
그걸 나보고 카메라로 찍어달라고 한다.
진짜 현실을 찍을 셈이구나,
이거 진짜 어떻게 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하고 괜히 궁금해서 심장은 두근거리는데
아중선배가 나타났다.
컵라면 3개를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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