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굴러 다니던 조생귤 하나를 집었다. 눈과 코를 싸인펜으로 슥슥 그리고 입 부분도 조금 찢어서 삐쭉이게 만들었다. 얼른 핸드폰으로 찍었다. 못 생긴 게 이목구비만큼은 또렷했다. 약간 그 사람과 닮기도 했다.
그날도 우연을 가장해서 마주쳤다.
“쌤, 이거 제가 키우는건데 함 보세요”
불쑥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사진을 들여다 보던 그 사람은 갑자기 꼬챙이에 찔린 소세지마냥 배를 꼬부리고 웃기 시작했다. 뭐가 웃긴지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오 좋아. 미끼를 물었다.
“이거 사진 보내드릴게요. 번호가…?”
그렇게 번호를 땄다. 그 다음부터는 가끔씩 안부정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썸 탄다고 하기도 뭐한 게 썸 탈 일이 전.혀. 없었다.
별다른 진전이 없어서 아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럴 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답문자가 빨리 안 오고 그러면 나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다른 남자를 만났다. 학교 동창이었다. 얘도 공부를 좀 잘해서 의사였다.
그 사람과 동창 녀석은 사는 동네도 전공 분야도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서로 마주칠 일이 거의 없겠다 싶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동창 녀석을 꼬시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편안하지 않았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남자에게 처음으로 철벽질을 당하니까 자존심이 엄청 상했다. 이렇게라도 공중 분해된 자존심을 회복해야만 했다.
얘는 어렸을 때부터 나를 좀 좋아하던 애라 뭐 꼬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여자친구가 이미 있었는데도 그냥 넘어왔다.
사실 외모만 놓고 보면 얘가 키도 훤칠한 게 얼굴도 잘 생겼고 끌고 다니는 차도 더 좋은 거였다. 나랑 아주 자고 싶어 가지고, 그 먼데서 막 차 끌고 오고, 얼마나 마음이 급하셨는지 글쎄 모텔 들어가는 꼬부랑 주차장에서 차문을 드르르륵 긁은 적도 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리비가 상당히 나왔을거다. 돈도 많이 못 버는 레지던트에게 떡치는 값 치곤 가혹한 액수였다. 내 앞이니까 허세 부리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얼굴이 허옇게 뜨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 흐연 얼굴을 해가지고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깟 수리비 쯤 껌인양 으스댔다.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미래를 같이 하기엔 좀 싸늘한 부분이 있었다.
왜 전화를 안 받냐는둥, 너 어디서 뭐 하냐는 둥 집착의 전조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뭐 여기까진 그럴 수 있는게 나랑 만났던 남자애들은 관계 후에도 내가 별로 연연해하지 않으면 그 만큼 불안해했다.
문제는 그의 아버지였다. 도박중독이었다.
과천에서 5번, 5번, 야이 달리라고 이새끼야!!!!!! 소리지르며 말밥주러 다니는 분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었다.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죽도록 고생한데다가 가정이 간신히 유지되고는 있지만 사실상 이혼상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말하는게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거짓말쟁이는 아니었다. 그런 얘기를 꾸미거나 숨기지도 않고, 다 얘기해줬다.
그 사람이, 멍한 눈으로 화면만 보고 있었어,
내가 그 사람을, 집으로 끌고 왔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 이야기까지 알게 되었는데 계속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나에게 기대어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누군가를 위로해 주는 척은 할 수 있어도 진짜 위로는 불가능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어서 천만 다행이었다. 슬슬 정리할 생각을 했다. 어느 날 그는 심하게 취해서 전화를 했다. 옆에서는 사람들이 웅얼거리고 있었다.
"이 나쁜년아 나쁜년아" 그의 목소리였다.
그때였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명철한 한줄기 목소리가 웅얼거림을 비집고 들어왔다.
"야 그만해, 쟤는 너 이용한거야."
그리고는 뚝 끊어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니 어떻게 알았지? 나는 정말로 그를 이용하고 있었다. 뭘 받아 처먹어야만 이용하는게 아니었다. 연애가 잘 안풀려서 지랄 뻗치려고 하던 그때, 그가 없었으면 내가 저 꼴이 났을 수도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을 또 만나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나는, 평생 한사람만 보면서 살지 못할 거 같아. 그런 생각이 들어 자꾸.
그런데 너랑 있으면 바람 같은 거 안 피울 수 있을 거 같아."
그가 늘 하던 이야기였다.
말없이 우수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면 나는 그냥 홀랑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비밀을 내가 같이 감당해주고 있다는 착각을 하면서,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라는 부질없는 위안을 얻으면서 말이다.
다행히 나는 운이 좋았다.
내 친구들은 장난으로, 다른 사람들은 진심으로, 나의 문어발짓에 대해 시국개탄에 준하는 분노를 표출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야야 느덜중에서 떳떳한 사람, 한 명이라도 있냐,
글면 나한테 돌던져도 되어야!
그때 유일하게 짱돌들고 나를 노려볼 수 있는 자가 있었으니, 룸메이트 모쏠 k양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남편과 사귈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k양이 갑자기 조개구이가 먹고 싶다고 했다. 여기가 아니면 안된다고 해서 굳이 굳이 찾아간 곳이었다. 꼭꼭 씹어서 잘 먹은 거 같았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밤이 되니까 아랫배가 싸르르 했다. 찍찍 물똥을 싸기 시작했는데 점점 심해졌다. 이거 이러다 장까지 쏟아지는 거 아닌가 싶었다. 등에선 식은 땀이 줄줄 났다.
사실 밤새 배 부여잡고 아이고 아이고 어매요 나 죽네 이러면서 설사 몇 번 더 하고 나면 분명히 좋아졌을, 흔하고도 흔한 배앓이에 불과하긴 했다. 하지만 하늘이 주신 이 기회를 고작 정화조 따위에 흘려 보낼 수는 없었다. 솔직히 나보다는 k양 상태가 더 심각했다. 변기를 부여잡고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하다 까무라쳤다. 이건 뭐 껍데기만 남아야 끝날 지경이었다. 누구 하나 누렇게 떠서 뒈져야 끝나는 싸움이었다.
'아, 그래. 그 사람에게 전화하자. 명분이 확실하다.'
그전까지는 전화를 할래야 할 건덕지도 없었다.
솔직히 나는 화장실 몇 번 징하게 들락거리고 나니까 별로 아프지 않았다. 내가 가진 특장점 중 하나가 소화기 계통이 엄청 강하다는 거였다. 4천만의 상비약 정로환? 흥. 나는 그딴 거 몰랐다. 어지간해서는 설사 몇 번이면 끝났다. 그래도 굳이 전화를 해가지곤 과장되게 앓는 소리를 해댔다.
이 사람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깐만요, 이러더니 진짜 그 밤에 응급약을 가지고 와주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순간 어떡하나 싶었다. 세면대 거울을 보니 얼굴이 말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씨발 조갯집 사장새끼 거지 같은 조개를 팔아? 확 처 발라버린다고 욕을 욕을 하면서 장을 쏟아내던 사람치곤 혈색부터 상당히 평화로웠다.
이게 원래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내가 무지하게 아픈 줄 알고 무리해서 온 거였다. 내가 평소에 워낙 빨빨거리며 다녀서 아픈 거랑은 거리가 먼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 밤에 전화해서 아프다고 하니까 진짜 무슨 큰 일이 난 줄 알고 달려왔던 거다.
머리털 흩날리며 급하게 오느라 아파 보였던 건 오히려 그 사람이었다. 내심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 속을 들킨 것 같아 몹시 찔렸다.
하지만 그 사람은 설사 횟수까지 물어보면서 자못 진지하게 대했다. 그거 하나는 확실해졌다. 아, 이제 이 사람은 내 것이 되겠구나.
진짜 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엾은 k양은 우리가 그렇게 사랑 놀음을 하고 있는 동안
누렇게 뜬 얼굴로 그가 건넨 약을 삼키고는
고시원 변기위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작가 돈주기 |
존재애애애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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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 | ||
미틴 뭐가이리재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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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위** | ||
k양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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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 | ||
하 마무리 너무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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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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