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고양이다.
길에서 태어났고 오가는 사람들은 나를 발견할 때마다 머리통 이며 턱밑이며 긁어준다. 형제들처럼 도망치지 않고 곁을 내어 준것이 화근이되었다. 행인들의 꽁무늬를 쫓아 다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는 형제들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뒤였다. 아직은 에옹에옹 우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다. 내 울음을 듣고 온건 엄마가 아니라 커다란 남자였다. 눈에 고름이 차서 앞도 잘 보이지 않았고 귓 속에는 벌레가 들 었는지 피가 나도록 긁었다. 비에 쫄딱 젖어 나는 곧 죽겠구나 하는 순간에 목덜미가 잡혀서 따뜻한 물에 목욕도 하고 배가 터지도록 밥을 먹고자고 또 잤다.
나의 이름은 기백이다.
주인은 어느날 부모님집에 데려다 놓고 사료값을 벌어 온다며 멀리 가버렸다. 최대한 잘생긴 얼굴로 문앞에 앉아 가족들을 기다렸다. 밤이 되고 현관에 벌건 불이 켜졌다. 우뚝 선 가족들은 나를 발견하고 당황한 것 같았다. 나의 존재에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젊은 여자는 나를 번쩍들어 안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조심스러운 성격인 것 같다. 함부로 나를 만지려고 하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다만 잠자코 사진을 찍거나 멀찌감치서 나를 뜯어보았다. 짐작컨데 여자는 고양이를 가까이에서 실제로 보기는 처음인듯 하다.
긴장이 풀려 살풋 잠이 들었을때 여자는 가만히 다가와 나의 발바닥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우악스럽던 내 주인은 나를 아령삼아 손에 들고 운동을 한다던가, 몸통을 세게 껴안고 무지막지하게 입맞춤을 퍼부었다. 술 냄새를 온 집안에 퍼트리는 날엔 신고있던 양말을 내 머리에 씌우기도 했다. 벗으려고 발광하는 나를 보며 꺽꺽거리며 웃었다. 작고 냄새나는 방한칸이 내 세계의 전부였다. 그 세계에서는 짓궂은 장난도 그리운 사랑이었다.
여자가 침대로 올라오기에 황급히 침대 밑으로 숨었다. 여자가 기척이 없기에 슬그머니 곁으로 갔다. 첫 날밤은 잠자코 몸을 사리기로 했다.
몇 밤이 지나 나는 여자의 살갗에 가만히 머리를 대고 낯선여자에게 나의 체취를 덮는다.
또 몇 밤이 지나고 나는 여자의 팔을 베고 잠을 잔다. 여자는 안전하다. 고요하다. 따뜻하다.
여자가 몹시도 소란한 날도 있다. 그런 날엔 여자의 시선이 내게 머무는 순간이 짧다. 나는 여기에 있고 가끔 잊혀진 것 같다.
여자의 생김이 다른사람이 되어간다. 자기 얼굴을 착착 소리나게 몇 번이고 때리고 크고 작은 붓을 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거울속에 자신에게 웃어보인다. 긴 터럭을 연신 빗질하고 흡사 그물 같은것에 다리를 넣는다. 조그마한 천 조각에 몸을 우겨넣는다. 기나긴 자학 끝에 홀연히 사라진다. 문을 닫기 전에 잊지않고 나를 돌아본다.
만난 남자가 팔목에 채워줬다는 팔찌는 며칠 여자에 팔에 걸려있다. 비가 오던 어느 날에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팔찌를 끌러 버릴까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내 목에 채워주었다. 이까짓거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 훌렁 벗을 수 있지만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볕이 좋은 날 창가에 앉아있다가 풀밭에서 까치가 깍깍 거리기에 휙 벗어 던졌더니 푸드덕 푸드덕 요란하게도 날아가버렸다. 나는 몇날이고 풀밭위의 팔찌를 구경했다. 풀이 높게 자라 보이지않을 때 까지 말이다.
여자는 이따금 서럽게 울었다. 어찌할바를 모르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어딘가 불편했다.
사람의 음식을 탐하는 취미는 없지만 길에서 살 적에 먹어본 적은 있다. 다 식은 음식을 조금 들고 들어온 여자는 내 주먹 만한 잔을 채우고 비우고를 반복하더니 처음으로 나를 부둥켜안고 잠을 청했다. 숨을 고르게 쉬는 것을 보고 나서 여자가 남긴 부스러기에 혀를 찍어보았다. 길을 떠돌던 시절에 배가 고파 쓰레기 봉지를 뒤지던 때가 떠올랐다. 엄마를 밤새 부르다 술에 취한 사람들의 발길질을 아슬하게 피했다. 토사물이라도 먹어야 했다. 고름낀 눈으로 바라본 나의 주인은 신인가 생각했다. 내 주먹만한 잔에 남은 물을 발로 찍어 먹었다. 잠들었다. 꿈에서 엄마를 본 것 같다.
여자가 닫힌 문 건너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는다. 본래 나는 인간사에 무심한 편이지만 빗소리가 나고 있다면 상황이 다르다. 여자가 위험하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않는다. 비를 오래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된이상 발톱을 세워 문을 부시기로 한다. 드디어 여자가 말간 얼굴로 문을 연다. 내가 구해준 것을 까맣게 모르는 눈치다. 나도 생색낼 생각은 없다. 금수에게도 도리라는 것이 있다. 그뿐이다.
다만 목숨값으로 사료를 받는 것은 이치에 맞다 생각한다.
주인이 돌아왔다. 몇 밤을 잤는지 세기를 포기했을 즈음이다. 내가 얼마나 자랐는지 번쩍 들어 무게를 가늠해보기도 하고 한 껏 늘려 길이를 재기도 한다. 나도 한사코 나의 성장을 뽐내기로 한다. 주인은 건너 방에 자리를 잡았다. 주인의 방은 곧 쿰쿰한 주인의 냄새로 범벅이 되었다. 여자의 방을 떠나와 오도카니 앉아있자니 괜스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의 방에 있다가도 주인이 돌아오면 부리나케 주인의 방으로 가앉았다. 두집살림하는 기분이 들었다.
주인의 방에서 지내는 통에 여자와 좀 멀어진 기분이 들던 무렵 거실에서 마주쳤다. 뭘 하는지 분주한 여자는 통 눈길을 주지않았다. 휴지통에 올라가 여자의 시선을 기다렸다. 이를테면 화해의 눈빛 같은 것을 보냈다. 나를 발견한 여자는 생각보다 훨씬 더 격하게 난리법석이었다. 아이 예쁘네 하며 보드라운 손으로 이곳 저곳을 만져준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종종 여기서 여자를 기다리곤한다. 혹시나 못보면 어쩌나 아주 조금은 초조하기도 하다.
바깥구경에 이골이나면 돌아 앉아 볕을 쬔다. 있지도 않은 추억을 떠올린다.
우리는 가끔 말없이 서로 바라보기만 한다. 졸린 눈을 부릅뜨고 여자가 시선을 거둘때까지 기다린다. 여자의 눈에 내가 맺힌 것을 보는 것도 나쁘지않은 구경이다.
어스름 어둠이 집안 구석구석 내려앉는 시간에 주인은 또 다시 떠났다. 차마 나를 돌아보지 못하고 무거운 뒷모습을 도장처럼 쿵 찍어두고 사라졌다. 주인의 배웅을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여자의 방문은 조금 열려있다. 혹시 여자가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쫓아내지는 않을까 배게맡에서 기다렸다. 여자는 여전히 별 말이 없었다. 우리는 사이 좋게 배게를 나누어 베었다. 슬쩍 여자에게 궁둥이를 붙였다. 여자는 안전하다. 고요하다. 따뜻하다.
나에게도 사춘기가 왔다. 조용한 여자가 달그락 소리만 내어도 거슬리고 짜증났다. 밖에서 까악거리는 까치도 싫다. 갑자기 빼액 소리지르는 여자의 부모도 저주스럽다. 이 모든 화는 여자에게 고스라니 간다. 나는 밍숭맹숭한 여자의 얼굴을 피가 나도록 물고 도망쳤다. 깊은 밤 슬그머니 여자의 곁으로 갔지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
나는 기백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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