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책상 앞에 앉았다
거의 2주 가까이 책상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책상은 내게 있어서 단순히 가구가 아니다
평생을 가지고 싶던 나의 책상

내가 내 손으로 직접 골라서 나의 쓰임에 맞게 구입한 이 책상은
한 때 톱밥을 먹던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의 프로토타입이다

방에 있으면 이 곳이 꼭 내 세상의 전부인 것 같고
내가 갇혀있는 감옥같다
그래서 눈을 뜨면 옷도 채 입지 못하고 허겁지겁 거실에 나와 앉는다
소파의 찬 기운이 등짝과 엉덩이의 체온을 슬그머니 가져간다
그래, 나와 함께 체온을 나누자꾸나 추위가 사그러들때까지 잠자코 앉아있는다

책상을 본다
2주동안 방치되어 있던 책상위에는 아침 볕이 들어 그간 착실히 내려앉은 먼지와 부스러기들을 비춘다
꾸겨진 종이뭉치 몇 개와 잃어버리고 사고 찾기를 반복해서 벌써 4개째 거의 새 것인 립밤
결국은 검정색 잉크를 담고있는 형태만 다른 볼펜들
뭉툭해진 연필과 지우개 가루들
끊어지기 일보직전의 고무줄
요령없이 쓰다 만 필름이 줄줄이 꼬부라진 수정테이프
쓰지도 않는 핸드크림들
수북히 쌓인 향의 시체들
사두고 통 먹지 않는 영양제와 갖가지 약봉투들 이미 먹은 찢어진 약봉지들
시기를 놓친 죽은 화분
머리카락이 칭칭감긴 머리빗
어디있는지 못 찾아서 새로 뜯은 두루마리 휴지와 연필꽂이 옆에 숨지도 않은 쓰던 휴지
자주 비울거라며 샀던 작은 휴지통에 솜씨좋게 가득 꼿힌 쓰레기를 아가리를 벌린 뚜껑이 턱이 아프도록 2주째 버티고 있다

먹은 것은 없지만 배가 부르다
오늘도 한숨 못잤지만 머리가 맑은 기분이다
비닐봉투 한장의 가벼움도 들 기운이 없었던 2주였다
영점 몇그램도 채 나가지 않을 비닐봉투를 들고 책상앞에 섰다
나름의 방식으로 어지럽혀진 책상은 생각보다 수월하고도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대패질을 하듯 물티슈한장으로 결결이 책상을 훔쳐냈다
물기에 얼기설기 붙은 지우개가루는 언제나 복병이다
두루마리 휴지를 15센티 자에 둘둘 감아 물기를 걷어낸다
서두르면 휴지조각이 지저분하게 들러붙는다
천천히 정확한 방향으로 한번에 주저없이 긁어내야한다
감긴 휴지를 반 바퀴돌려 마른 면으로 다시 한번 반복하고 나니 만족할만큼 더 할나위 없이 말끔한 표면을 보게된다

커피를 한잔 내리고 일부러 작은 커피잔에 물을 조금만 섞어서 책상으로 가져왔다
잠시 엉덩이를 붙이다 다시 일어나서 얼마있지도 않은 빨래를 돌렸다
빨래가 쌓이는 것은 설거지가 쌓이는 것 다음으로 귀찮은 일이다
제일로 귀찮은 일은 마른 빨래를 개는 것, 개서 옷장에 곱게 넣는 것.

세탁실에서 돌아나오며 개수대를 보니 먹은거라고는 커피뿐인 집구석에 다녀간 손님도 없는데 커피잔만 6개이다
어느하나 같은 모양의 컵이 없구나
찬장을 열어서 내가 가진 컵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다 망해버린 가게에서 들고 온 무슨 맥주 무슨 소주잔
가끔 들르는 스타벅스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하나씩 샀던 시즌 컵
벌써 10년도 더 된 오래된 커핏잔
집들이 선물로 받은 스타벅스의 머그잔
일본여행에서 사온 고양이 발모양의 컵
어디 카페에서 팔던 프랑스어쩌구 황갈색의 투명한 컵
왜 샀는지 알길이 없는 이런 저런 외톨이의 컵들이 아무튼 가득하다
버릴 놈이 있나 잠깐 생각했지만 다 언젠가는 쓸 것같고 뭐 나름의 사연도 있고
찬장문을 닫았다
설거지를 할까
아니다 설거지는 눈물이 또 속절없이 날 때 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아사직전의 노트북에 전원을 연결하고 짧은 부팅시간동안 한 김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새로 산지 이제 꼭 두 달이 된 노트북은 이제 제법 익숙한 바탕화면을 보여주었다

무엇을 해야할까
해야할 일은 하나도 없다
하고싶은것을 하면 된다
사실 해야할 일이라는 것은 찾으면 많다
미래를 위한 공부, 세상돌아가는 소식읽기,별 소득없는 SNS, 하다못해 유투브를 틀어놓고 쓸만한 알고리즘을 타고 타고 타다보면 하루가 다 가겠지

클라우드를 열어서 가구를 만들던 2009년의 사진을 보고있다
마냥 좋았던것 같던 그 시절의 사진을 들여다보니 까맣게 잊어버린 그때의 힘듦과 괴로움, 외로움, 막막함, 억울함, 두려움 온갖 까만기억이 소스라치게 떠올랐다

- 시발 내가 미쳤지. 뭐 한다고 이걸 또 처 보고앉았나

듣는이는 나뿐이라 나만 들리도록 볼륨 1 정도의 크기로 말했다

"대단하다! 가구를 만들었어?"
"멋있다! 글을 쓰다니!"
"우와, 어떻게 영어를 가르치냐?"
"세상에, 기타도 칠 줄 아세요?"
"진짜 그 나이로는 안보여요!"

사람들이 멋있다, 근사하다고 말해줬던 나의 수식어들은 나를 도리어 부끄럽게 만든다

나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뭣 모를때 줄줄이 읊어대던 나의 '특기'들은 내 입에 풀칠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제는 특기란에 무엇을 쓰면 좋을지 도무지 모르겠다

특히 잘하는 기술
특별히 뛰어난 기능

머리카락을 잘 줍는 것
나를 위해서라며 충동구매로 옷장과 신발장을 채우는 것
그럴 수 있지 타인이 내게 벌이는 모든 일을 이해하는 척 심드렁하게 넘기는 것
양치를 하고나면 꼭 양치컵 주둥이를 손으로 훑어서 헹구고 거치대에 뒤집어 두는 것
어둠속에서 한참동안 아무것도 하지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싸움을 피하는 것

어디 수녀원 소사로 일하기 딱 좋은 특기이다
망가진 의자나 삐걱거리는 문짝 같은것도 고칠 줄 알기 때문에


의사는 나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말아야 할 것을
제약회사이름이 하단에 찍힌 메모지 두장에 나누어 적어주었다


해야 할 것

자극에 반응하기
공들여 씹을 만한 음식으로 끼니먹기
하루에 3번이상 베란다에라도 나가서 직접 해를 쐬기
되도록이면 5분이상 외출하기
일주일에 한번은 가족이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15분이상 통화하기
눈물이 나면 울음을 쥐어짜지말고 다른 일을 하면서 흐르도록 둔다
생각이 글로 바뀌어서 머릿속으로 쏟아지면 일단 쓴다


하지 말아야 할 것

목적없는 생각
잠이 올때까지 몇시간이고 누워있기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사연을 읽거나 듣기
사람에 책임감 가지기
귀책없이 죄책감 가지기
글에 대한 반응에 일희일비하기



처방 받은 약은 정신을 맑게하지만 시간을 잘 못 맞추거나 커피를 많이 마신 날에는 한 숨도 잘 수가 없다

.

커피를 줄이세요.

압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마시게 되니까 어쩌겠어요.

괴롭지않으세요?

괜찮아요. 잠이야 죽으면 실컷잔다더라고요.

누가요?

엄마가요.

실컷 자는게 소원이었겠네요.

맞아요. 실컷자고싶어서 멀리 도망쳤던것 같아요.

잘했어요. 잠뿌리 뽑을때까지 자면 한편으론 아쉬워도 개운하니까요.

죄책감이 들어요.

많이 자면요?

네. 열심히 살지 않은 것 같아서 뭔가 죄스러워요.

누구한테요?

모...르겠어요. 죄책감이 원래 상대가 있는거죠?

뚜렷한 대상이 없을 수도 있죠. 성실에 대해서 자기도 모르게 아주 오래 꾸준히 주입된 시스템 같은거예요. 본인이 겪는 죄책감은 시스템상 거스르면 도출되는 값이죠. 그런데 본인은 영문도 모르고 마냥 마음이 무거웠던거라고 보면 어떨까요.

원망하라는 소리는 아니실거잖아요. 저는 원망하고 싶어져요.

제가 젓갈을 엄청 큰 통으로 샀어요. 매 끼 먹기도 하고 가끔 잊기도하고 또 생각나면 먹고. 그러다 한 며칠 배가 너무 아프고 가렵고 막 죽겠더라고요. 그러다 또 며칠 뒤에 생각이 나서 젓갈을 꺼냈어요. 늘 아무생각 없이 그릇에 옮겨 담았는데, 그날 통속을 들여다보니 왠걸 쩌기 구석퉁이에 뜯겨나가고 남은 곰팡이들이 있는겁니다. 아마도 빙 둘러서 죄 곰팡이가 슬었던 걸 제가 부지런히 퍼다 먹고 그만큼만 남은거겠죠. 아,내가 축농증이 심해서 냄새를 못 맡아서 몰랐구나. 축농증 이게 저희 외가쪽 유전이거든요. 어머니를 원망하면 나아질까요? 이제부터 안먹으면 되죠. 그냥 버리면 되요. 다음번에는 큰걸 사지말고 작은 걸 사서 자주 사먹으면 되는거죠. 

.

수채구멍에 툭 하고 묵직하게 떨어지는 젓갈을 생각했다. 물을 틀고 서서히 양념이 묽어지면서 건더기만 남고 물에 녹은 것들은 하수도로 흘러간다. 한참을 물을 흘려보내니 말갛게 양념끼 씻긴 곰삭은 재료가 채에 걸려져 남아있다. 낙지일수도 창란일수도 어리굴젓일수도 있겠지. 

원망은 한다 만다의 논쟁거리조차도 되지 못한다

흘러간 물이 곧장 절벽으로 떨어져 버릴것 같다면 중간쯤에서 막대기를 꽂아 우회하는 길을 주욱 그려주면 물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로 흐르게 된다

길을 만들어주면 된다 

콘크리트를 치고 아스콘을 끼얹는 길이 아니어도 아 이쪽이구나 정도의 표시만 난다면 그것도 누군가에게는 길이다
그리로 가면 된다

숨이 붙어있을 때 까지 어디로든 계속 길을 만들며 흘러가면 된다 젓갈의 씻긴 국물처럼

하필은 곰팡이 핀 젓갈 국물이지만 끝도없이 끝날때까지 흘러간다는 것은 굉장히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의 말을 어느 순간 끊어먹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

속이 좀 쓰리다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되도록이면 식후에 드세요. 알람맞춰두셨죠? 시간 잘 맞춰서 드시고요. 간호사가 소분해서 다닐 통을 줄겁니다. 

아, 네네. 수고하셨어요.

요 밑에 분식집에 떡볶이는 별론데 우동은 괜찮더라고요 어차피 제품이겠지만. 먹고가요 그냥 또 맹 커피만 먹지말고

아, 네네. 감사합니다.

.

아딸 간판이 떨어진 자국이 선명한데 그 위로 감탄이라고 새로 붙은 분식집에 들어가 우동을 주문했다

.

원래는 우리 단무지 주는데, 특별히 김치드린다 얼마 안남아가지고 ㅎㅎㅎ

.

문자 그대로 면도 국물도 아주 괜찮았다
의사의 말을 그대로 잡아채 냄비에 넣고 끓인 그런 우동이었다
1티스푼의 차이로 맛이 없었을 수도 있는 절묘한 맛
양념만 흥건히 남은 통을 휘휘 저어 건진, 상에 낼 만한 대 여섯 조각의 김치도 내일이면 너무 시었을, 오늘은 아주 딱 잘 삭은 맛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책상앞에 앉아서 글을 썼다
작품 등록일 : 2020-10-08

▶ 오늘은 집사람의 본가를 털었다

▶ 하준이, 하준이는 내 짝꿍

댓글부터 달고 읽는다
푸드덕   
사랑받고있고 사랑받을거야
사랑하는 사람은 지속될수도 바뀔수도 있지만
꼭 그럴거야 언니
시트러스   
언니 제가 이담에 출판사차리면 언니 에세이 꼭 내고싶어요. 딴데 계약되면 어쩔수없지만 그때까지 좋은글 많이 모아둬주세요 언니의 글은 더 많은 사람들이 울고웃게 만들 힘이 있어요 건강하세요 언니
긴나지   
특기 글이잖아 작가 언니야~
살구살구살...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좋다. 나도 기억해야지. 의사샘 말도 좋은걸.

그냥 나도 숨이붙어있을때까지 어디로든 길을 만들어서 흘러가야지.
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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