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집사람의 본가를 털었다
뭣 좀 가져다 달라고 만원의 수임료를 받고
하루5분이상 외출하라는 의사의 말을 받잡아
킥보드를 타고 30분남짓 거리에 있는 집사람의 본가로 갔다

내 아파트는 IMF때 완공되어 20년도 더 된 대규모 아파트다
집사람의 본가는 지어진지 5년 정도 된 이 지역 최초로 지어진 소규모 최신식 고급아파트

집사람의 본가는 늘 비어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다녀간것이 언제인지 알 수없는 남의 빈집에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끼고 들어가니
빈집털이범이 따로 없는 기분이다

처음가보는 것도 아닌데 몇년만에 오니 낯설고 새삼스럽다

한 층에 두집이 쓰는데 복도랄까 내가 살던 원룸보다 넓은것 같다
앞집에는 애가 몇이나 살길래 어린이 자전거가 4대나 주차되어있다
그러고도 한참을 넓다

자기 엄마의 생년월일을 누르고 집에 들어갔다

최고급내장재를 기본옵션으로 두른 거대한 집이다
온갖 비싸보이는 조형물과 그릇
자가드 커튼 원목가구 집사람엄마 취향으로 채운 버려진 집이다

집사람의 방
우리는 몇년전 이 방에서 처음으로 살을 섞었다
별 감흥이 없다
나는 정숙한 정신병자이므로 그때를 추억하며 바지를 벗지는 않는다

- 어디에 뒀다는거야

책장이며 서랍을 용의주도하게 뒤진다


집사람의 워너비인 배 다른 형이 받았던 연애편지들을 소중히 모아뒀다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마저 잘했던
지금은 성공했다 할 수있는 대기업에 다니고
아들하나를 낳고 강남에 아파트에서 살고있는 형
결혼할때 5억이나 받았지만 형은 끝끝내 손주를 엄마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처가 불편해한단다
그러면서 매주말 집사람 생부에게 찾아가는 형
집사람 생부가 집사람 엄마에게 소송을 걸었을때도 
형은 아빠측에서 증언했다
집사람은 알바한 돈으로 조카에게 줄 선물을 사서 엄마가 건낸 금10돈을 가지고 돌잔치에 갔다
친가쪽 사람들은 내내 불편하게 대했고 아는척도 하지 않았다
집사람은 그날을 마지막으로 형을 지웠다
.
.
그리고 집사람의 2014년 2016년 일기장을 발견했다

군시절 막바지에 쓰던, 전역후의 일기장이다
2016년이라면 나를 만나기 1년 전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언제 만났더라 가물가물하지만 조카가 태어난 해였으니
2017년이 맞다

들고올수는 없으니 뭐라도 써진 페이지는 모두 사진찍어뒀다
내 집에도 집사람의 스프링공책이 많다
특징이라면 아무 그림없는 플라스틱표지의 줄지 캠퍼스노트로 한 두 페이지 끄적거리다 말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자식은 예전에도 그랬고 여전히 그렇다
진득한 구석이 없다
당장에라도 뭔가를 해낼 것 처럼 꿈에 부풀어 계획을 세우고 백알몽에 지나지 않을 허풍을 진지하게 내게 털어놓는다

처음에는 기특하고 대견했지만 이제는 안다
저러다 또 엎어질 것들이라는 것을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는다
아직은 20대이니 얼마든지 그럴 때고말고
나는 20대시절에 치열하게 뼈를 갈아 직장생활을 했다지만
사는 꼴은 훨씬 더 형편없었다

미혼의 직장동료들과 모조리 잠을 잤고
떠벌이 새끼들 덕분에 온 회사에 걸레라고 소문이 났다
당시 남자친구는 2년을 쫓아다니던 나와 자기회사 경리를 동시에 만났고
격주로 나를 만나 모텔도 아닌 공사장 인부들이 달 숙소로 쓰는 여관방에서 떡을 치고
그렇게 아낀 돈으로 경리와 조선팔도 여행을 다니고 호텔에서 경리를 뜨겁게 안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집사람 나이에는 탬버린을 흔들고있었다
병신같은 새끼 똥꾸멍에 번돈을 처박으며 창문도 없는 월9만원 짜리 고시원에서 공짜라면으로 허기를 때웠다
그 병신같은 새끼는 그 돈으로 새파랗게 어린 년과 바람을 피웠고 나는 그 새끼의 친구들과 몰래 데이트를 했으며
술김에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손님과 잠을 잤다
나를 위해 쓴 돈은 스타킹과 위장약 고시원 방값이 전부였다
홀복이며 구두는 나를 위한거라고 보기어려우니 차치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먹을 것을 조금 샀다
호박고구마 밤고구마를 적절히 섞어 담고
미국산 냉동부채살 1kg를 샀다
집사람이 좋아하는 오렌지를 마지막으로 담았다

어느새 날이 깜깜해졌다
바깥 날씨를 몰라 입은 기모 후드티는 오늘은 좀 더웠다
남의 빈집을 뒤느라 콩죽같이 흘린 땀이 글을 쓰는 동안 식어 갑자기 오한을 느낀다

앉은자리에서 줄담배를 3개나 피웠다
딴 짓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면 피운것 같지도 않다
말보로 레드는 타르가 8미리나 된다
집사람에게서 담배를 살때마다 이 독한걸...하며 바코드를 찍는다
가끔은 돈을 받지 않는다

이제 집으로 가야겠다
한 끼도 먹지않아 아깐 좀 손이 떨렸는데 이젠 괜찮아졌다
원래 계획은 다이소에서 뭘 사야했는데 기억이 나지않는다

얇은 닙의 파란잉크의 캘리그래피펜도 하나 사려고 했는데 주변이 너무 어두워서 갑자기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집에가면 고구마를 삶고 고기를 좀 구워서 먹을 계획이다
아까찍어둔 집사람의 일기를 읽어볼까싶다

드문드문 보이던 그 이름
집사람의 첫 사랑
한번 사귀어 보지도 못하고 잠도 못자본
집사람 지인들은 모두 알고 있는 
집사람의 여신

그리고 스쳐지나간 여자들 

기회가 되면 타이핑을 쳐서 문서로 만들어 둘까싶다

나는 그런 변태다
남의 해묵은 사랑얘기가 참 재미있는 변태

+아니**
응 다르지 저 '당시'에 집사람은 중2였고, 저 '새끼'를 만날적에는 집사람 아마도 고딩이었을걸
작품 등록일 : 2020-10-12

▶ 컴퓨터실 선생님

▶ 오랜만에 책상 앞에 앉았다

편의점지금남친이나 이전에 만난 고시원 총무남친이나 도찐개찐.. 후자가 더 쓰레기긴 하지만.. 걍 남자안만나고 글쓰고 혼자살면 안됨?
신지로   
여기에서 그새끼였다가 집사람도 나오고 남자친구도 나와서 헷갈려....호칭이 다 달라서..나오는 남자가 2명이네..그래도 난 지금 집사람 반대야.. 무급이 너무 강렬했음 ㅜ와 그런 남자들만 만나노
리본돼지   
스샷에서 스쳐간 여자 중 한명이 사와지리 에리카 라는 거구나 ㅎㅎ 귀엽..
너를 많이...   
당시 남자친구랑 지금 집사람이랑 다른 사람 아니야?
아니****   
구래도 언니랑 집사람 응원한다 나는
코히   
처음 읽었는데 대체 오ㅐ...라는 생각과
이건 사랑인가...습관인가..알수없어 혼란스럽다
Bambibaby   
정말 거지같은 남잘 만났네...편의점 무급 사건도 그렇고.....집사람이라는 표현도 아까버
언니 감정도 풍파 다맞은 사고쳤던 노친네 데리고 사는 오래된 부부같아 헤어지라 하고 싶은데 묵은때같아서 헤어지라고도 못하겠어ㅜㅜ
리본돼지   
오늘도 여전히 재밌다
살치살 꽃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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