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요리 은퇴. by보패(13)
보패 2020-04-27
할머니가 주방에서 은퇴했다.


전에 <할머니의 괴식>편에서도 언급했지만 나의 할머니는 맹기용 양싸다구 후려칠 정도의 괴식 전문 와갤요리사다. 솥뚜껑 운전 60년을 넘기도록 한결 같았다. 자식들도 할머니의 요리를 싫어했다. 할머니의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할머니는 남이 만든 산해진미보다 자기 손으로 만든 괴식을 선호했다.

90을 앞둔 나이에도 자기가 먹을 건 손수 지어 세 끼 밥을 차리던 내 할머니. 그것만이 삶의 낙으로 보이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이제 요리를 영영 그만 두게 된 것이다.
*<할머니의 괴식> 다시읽기:
https://m.idpaper.co.kr/counsel/item/item_view.html?cnslSeq=502039

나는 할머니가 쭉 가늘고 길게 건강할 줄 알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친인척들이 치매나 암에 걸리고 당뇨 합병증이나 뇌졸중으로 위독해지거나 화장실이나 빙판에서 넘어져 뼈가 나갈 때에도, 우리집 할머니에게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도 못들을 만큼 귀가 어두워지고, 이상한 데에서 똥고집을 부리고, 씻기 싫어해서 한 달에 한 번 겨우 머리를 감고, 자기 나이가 몇인지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 만큼 멍청해졌지만ㅡ 어쨌든 할머니는 또래에 비하면 그럭저럭 정신이 또렷한 채로 평화롭게 늙어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3월초의 새벽.
할머니가 화장실을 가다가 방바닥에 넘어져 그대로 오줌을 싸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자다 깨서 달려나갔다. 오줌으로 푹 젖어 흑흑 하고 흐느껴우는 할머니의 옷을 조심조심 벗기고 몸을 닦아줬다. 몇 년 전에 할머니가 담석 수술로 입원했을 때 쓰고 남은 기저귀를 찾아내 채우고 다시 재웠다(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그 밤 이후 할머니는 급격히 시들어버렸다. 멀쩡하던 자신이 노망난 늙은이처럼 바지에 오줌을 싸버렸다는 것 때문에 충격으로 쪽팔사를 해 버리신 게다. 아무것도 못 하겠다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차려준 죽을 몇 술 겨우 뜨고, 기저귀를 찬 채로 며칠을 누워 지냈다. 젊은 사람이 노인네 기저귀를 몇 번만 갈아보면 왜 간병살인이 일어나는지 대충은 알게 된다. 아이고 불쌍한 우리 할머니, 살이 너무 빠져서 새털같이 가벼워, 라고 생각했는데... 기저귀 갈려고 할 때는 어찌나 천근만근인지.

누워만 있는 할머니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자식손주 다 나서서 병원에 가자고 해도 절대 가기 싫다고 짜증을 냈다. 할머니 이러다 집에서 죽을거야? 라고 눈물로 호소도 해 보았지만ㅡ
“이렇게 누워있으면 낫겠지.”
“낫긴 뭐가 나아, 무식한 소리 좀 그만해. 할머니 이러다 진짜 죽어.”
“죽으면 죽는 게지. 나가라.”
아예 의식을 잃으면 구급차라도 불러서 실어갈텐데 이건 뭐 정신은 또렷하고 짜증은 심하니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조금 기운을 되찾은 할머니는 두꺼운 기저귀가 갑갑해서 싫다고 나 몰래 자꾸 벗어놓았다. 그래서 지마켓에서 커다란 스테인리스 요강을 사드렸다. 내 평생에 그런 걸 쇼핑하는 날이 오다니. 혹시 자다가 실수를 해도 이불이 젖지 않게, 환자용 방수 이불보도 샀다. 얇아서 착용감이 좋은 고급팬티형 기저귀도 샀다. 할머니는 고맙다, 고맙다 삼백번쯤 말했다.
“자식보다 내가 낫지?”
나는 나도 모르게 좀 재수 없게 으스대며 이렇게 대꾸했다. 아아... 나란 년도 그저 아가리로만 세상 냉정한 척 할 뿐 알맹이는 어쩔 수 없는 한녀, 효성 지극한 유교걸인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또 딸이라고 병원에 와보지도 않은 사람인데. 나한테 뭐 먹으라고 권하는 건 상한 음식, 상할랑 말랑 한 것, 먹다 남은 찬밥뿐이고 맛있는 건 감춰놓던 사람인데. 치사하게 먹는 걸로 설움 주는 게 이런거구나, 하고 알게 해 준 사람. 그런 사람 뭐가 곱다고.

연초부터 출근하던 요양보호사 아주머니가 없었다면 난 조금 미쳤을지도 모른다. 코로나 때문에 일이 캔슬되고 저절로 집콕을 하게 된 내게 당연하다는 듯 할머니 수발이 떠맡겨졌는데, 평일 5일간의 낮 세 시간은 그나마 쉴 수 있었으니까.

아주머니는 말없이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할머니가 애용하는 스뎅 요강을 매일 락스로 깨끗이 소독하고 번쩍번쩍 광이 나도록 닦아놓는다.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머리회전을 할 수 있게 상냥하게 말을 많이 걸어준다. 집에서 할머니가 오가는 부분은 먼지 한 톨 안 남도록 모조리 쓸고 닦는다. 우리집 늙은 개의 화장실까지 청소해준다. 그건 원칙상 그녀가 안 해도 되는 일인데.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주업무는 괴식을 만드는 것이다. 할머니는 요리를 은퇴한 대신 그녀를 아바타 삼아 평소 먹던 괴식을 구현해냈다. 양배추 찌개, 무 찌개, 있는 거 다 때려넣어 볶은 이상한 반찬 등등.

처음엔 아주머니가 냉장고에 있는 걸로 알아서 반찬을 만들어 놓고 갔다. 어묵볶음, 두부조림, 된장찌개 같은 것. 그것들은 내가 보기엔 평범하게 맛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에겐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기운을 조금 되찾은 할머니는 부엌 한켠 바닥에 퍼질러 앉아 아주머니가 요리하는 것 하나하나를 간섭하기 시작했다. 보는 내가 다 신경질이 날 지경인데, 놀랍게도 그녀는 예예 어르신 하고 싹싹하게 대답해가며 할머니가 시키는 그대로 한다. 솜씨 좋은 아바타다.

다음은 아주머니가 할머니 괴식 아바타로 빙의했을 때 내가 어깨너머로 구경하고 기록한 <무 찌개>의 레시피다. 양배추 찌개는 여기서 무를 양배추로 바꾸고 그대로 만들면 된다.


1.돼지 안심 해동한 것 한 토막을 잘게 다져서 냄비에 넣고 참기름을 넣어 달달 볶는다.

2.고기가 다 익으면 물을 잔뜩 넣고 끓인다. 멸치다시마 육수 그딴 거 안냄.

3.무를 잘게 채쳐서 냄비 한 가득 때려넣는다. 밸런스 그딴 거 없음.

4.무가 좀 익으면 다진 마늘, 다진 파, 고추장 아주 조금, 국간장, 다시다 한 숟갈, 잘게 다진 새우젓 약간, 올리고당 듬뿍 넣고 끓인다. 아무튼 다시다는 존나 왕창 꼭 넣어야 함.

5.무가 흐물흐물해져서 곤죽이 되고 국물이 거의 없어질 때까지 끓인다. 급식실 짬통 비주얼이 나오면 완성. 무의 형체가 남아있으면 안 됨. 국물이 보여도 안 됨. 지옥의 꿀꿀이죽.


*아주머니의 평:
“이해가 안 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특히 올리고당을 왜 넣는지 모르겠다. 무 본연의 맛으로도 충분히 들쩍지근한데 올리고당까지 넣으니 너무 달다. 마지막에 맛을 한 숟갈 봤는데 너무 달아서 헛구역질이 났다. 어르신께도 맛을 보여 드렸더니 딱 좋다고 고개를 끄떡이셨다. 그 말 듣고 깜짝 놀랐다. 이게요? 진짜요? 이랬다. 중간에 어르신께 올리고당은 안 넣어도 되지 않을까요 여쭤봤더니, 테레비에서 올리고당이 좋다고 했다고 꼭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장건강에 좋다고 자꾸... 그리고 무가 너무 많이 들어가는 거 아니냐고 말씀드렸는데...무에 식이섬유가 많으니 몸에 좋다고 많이 먹어야 한다고 그러셨다. 테레비에서 봤다고 하셨다. 아무튼 나는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더는 이유를 생각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이 평을 듣고 나는 다시금 생각하였다 :
빌어먹을 방송국 놈들.
공영채널 아침방송이야말로 괴식의 원흉이다.


-끝-


영업:
집밥 아ㅡ트 (15)탄 업뎃. 강제 집콕으로 열심히 차린 집밥 사진이 가득. 문학관으로 어서 오십쇼.
https://m.idpaper.co.kr/book/view.html?workSeq=5216

+ 할머니 저러다 쇠약해져 그대로 돌아가시는건가 하고 걱정했는데, 이제 괜찮다. 자기 말대로 정말 집에 가만히 누워있으면서 회복했다. 쪽팔사 했다가 1달 걸려 부활. 놀라워.

할매 여전하시네ㅋ 큰일 안나서 다행이다
tlghkfkd 2020-04-27
답글쓴이 돈주기   
ㅠㅠ
그나저나 요양보호사 아주머니 굉장히 유능하시네 ㅋㅋㅋ
벌꿀오소리 2020-04-27
답글쓴이 돈주기   
왜 울컥했지..
우리 할머니도 쓰러지셨다 다시 부활하셔서
피닉스 안이라고 부르는 중 ㅋㅋㅋ
김씨 2020-04-27
답글쓴이 돈주기   
별일없으셔서 다행이다
근데 요양보호사 아주머니 정말 최고의 직원이시네 ㅋㅋㅋㅋㅋ
히읗 2020-04-27
답글쓴이 돈주기   
나도 할머니 간병 해봤는데 변기저귀 가는것 보다 아픈사람 특유의 히스테리를 받아주는게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어 많이 힘들 것 같아 힘내
미미미 2020-04-27
답글쓴이 돈주기   
요양보호사.. 요양보호사야 말로 내 노후준비의 큰 영감이다..
바질칼국수 2020-04-27
답글쓴이 돈주기   
내가 저 아주머니 보면서 느낀 건데 요양보호사는 정말 개나소나 할 수 없는 직업 같아.
부처님 가운데토막 정도는 되는 인격자가 아니면 성격파탄을 얻게 될 상황이 너무 많아 보임.
노인의 괴팍한 똥고집과 비효율적인 요구들은 끝이 없어. 거기에 말대꾸 않고 웃으며 응해야 되는 서비스직이기도 함...
보패 2020-04-27
답글쓴이 돈주기   
쪽팔샄ㅋㅋㅋㅋㅋㅋ
도맛호 2020-04-27
답글쓴이 돈주기   
언니는 글을 참 잘 쓴다.
yj**** 2020-04-27
답글쓴이 돈주기   
재밌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요양보호사를 잘 구한듯
전생에로마공주 2020-04-27
답글쓴이 돈주기   
보패아니고 보살인듯....
th****** 2020-04-27
답글쓴이 돈주기   
ㄴ 내 안에 김첨지가 있어. 후우
보패 2020-04-28
답글쓴이 돈주기   
와...요양보호사 아주머니 리스펙이다
amaxxxx 2020-04-29
답글쓴이 돈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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